[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화려한 지옥’을 구원하다


부산시 동구 증산공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한 주민이 걸어 올라가고 있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부산진교회(왼쪽)와 일신여학교.


부산 최초 여성교육기관이었던 일신여학교. 현재 기념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산 동구 좌천동. 무수히 많은 골목과 계단은 굴곡진 서민들의 삶을 닮았다. 삶의 기쁨과 탄식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돼 널려 있는 골목길을 걸으며 민중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 한 작가를 기억했다.
 
여류소설가 김말봉(1901∼1961)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밀림’ ‘찔레꽃’ 등의 파격적인 대중소설로 통속작가란 인식을 주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당당하게 ‘대중소설가’를 자처했고 작품을 통해 대중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쉬운 문장,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편린들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문학적 특성은 대중성과 기독교정신의 구현이었다.
 
대중은 민중이다
 
‘대중’은 작가의 시대정신이었다. 작가가 말하는 대중이란 역사를 움직이는 어떤 계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참된 삶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공동체’다. 정의 실현을 지향하는 민중과 상통한다. 그는 58년 한 일간지의 소설 연재를 끝내며 이렇게 말했다.
 
“대중소설이라면 으레 저급하다는 착각을 하지만 대중이 얼마나 정의감에 불타고 있는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대중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작가적 신념이었다.
 
대표작 ‘밀림’ ‘찔레꽃’은 30년대 젊은이들의 자유연애와 결혼관, 자본주의적 빈부갈등이 드러나 있어 시대상황이 효과적으로 반영돼 있다. 특히 돈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다양한 인물상과 화려한 부유층의 삶을 통해 감각적으로 체화해 나간다.
 
광복 전 작가의 문학세계는 개인이 가진 애정이 애욕으로 발전하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였지만, 광복 후엔 사회공동체에 눈을 돌려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췄다.
 
김말봉은 장편소설 ‘찔레꽃’을 발표한 37년 이후 8년 동안 일제에 항거해 붓을 꺾었고 해방 후에 혼란한 사회 속에서 억압받아온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글을 썼다. 절필 후 처음으로 쓴 것이 ‘화려한 지옥’이다.
 
“내 분명코 조선 여인의 한 사람으로 외치고 싶은 사회 비극의 한 토막을 소설화했다. …‘찔레꽃’을 쓰고 붓을 던진 지 십여 년 만에 (해방 이듬해) 첫 번으로 붓을 든 것이 ‘화려한 지옥’이다. 지금 이 가혹한 전시하에 색다른 분위기의 작품인 채로 참된 인간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욕을 알아주기를 부탁한다. 여인은 인간이면서도 약하고 약하면서도 선하고 그리고 어느 남자보다 훨씬 강한 일면이 있는 것이다.”(소설 ‘화려한 지옥’ 서문 중에서)
 
문학적 토양, 부산
 
부산에서 태어난 김말봉의 문학적 토양은 부산이다. 그가 서울로 이주한 것은 광복 이후다. ‘밀림’과 ‘찔레꽃’을 집필하는 동안 거주했던 부산시 동구 좌천동을 지난 16일 찾았다. 좌천동은 증산자락을 따라 경사로에 집들이 밀집해 있다. 주민들은 매일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병원과 시장 학교 직장을 다닌다. 작가 역시 이 길을 오르내리며 일상을 꾸렸을 것이고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다.
 
이곳엔 산복도로(산중턱을 지나는 도로)에서 마을 꼭대기에 있는 증산공원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평균 경사 약 37도, 계단 수만 160개에 달해 주민들 사이에서 ‘지옥의 계단’으로 불린다. 그러나 지난해 좌천동의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에서 증산공원을 잇는 지옥의 계단 구간에 경사형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증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증산공원까지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오를 수 있었다. 증산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길의 굴곡은 서민 삶의 굴곡을 담은 듯 구불구불했다.
 
다시 산복도로를 출발해 가파른 ‘갈맷길’을 걸어 내려가면 오른쪽에 붉은 서양식 벽돌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부산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3·1 독립운동의 진원지다. 작가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워준 곳이다. 일신여학교 건물은 부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벽돌건물이며 현재는 기념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신여학교 맞은편엔 1890년 베어드 선교사가 한옥 한 채를 짓고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과 예배를 드린 곳에서 출발한 부산진교회가 자리한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초대 당회장 왕길지 선교사의 기념관이 있다. 갈맷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가 왼쪽 골목길로 돌아서면,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지역 여성들에게 기독교 박애정신으로 의술을 베풀었던 일신기독병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폐창운동 선봉에 서다
 
그는 문학과 삶의 일치를 보여준 작가이다. 김말봉은 광복 직후 폐창(廢娼)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 1916년 일제에 의해 강제 도입된 공창제를 ‘일제의 잔재’로서 청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46년 6월 조선부녀총동맹은 ‘공사창 폐지를 위한 대책 좌담회’를 열고 성판매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생활대책 마련과 이들에 대한 인격 존중의 태도를 주장했다. 그리고 8월에 ‘폐업공창구제연맹’을 결성해 성매매여성들의 갱생 운동에 앞장섰는데 이 단체의 회장을 맡은 사람이 김말봉이었다. 광복 후 그는 폐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해 나갔고 그 결과 46년 인신매매 금지령이 내려졌고 48년 2월 14일 입법화되어 공창 폐지가 선포됐다.
 
작가가 주장하는 공창 폐지의 당위성은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공창 폐지의 사명은 횡으로 유곽의 여인들을 인도적으로 구원하자는 것과 또 종으로 민족보건을 위하여 성병을 박멸하자는 민족의 보건운동으로 볼 수 있구만요. … 공창 폐지 연맹이야말로 건국의 가장 초석적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화려한 지옥’ 중에서)
 
소설 속 공창폐지연맹위원장 정민혜 여사는 바로 작가의 모습이었다. 주인공 채옥은 정 여사로부터 자기와 같은 사람도 ‘거룩한 하나님의 딸도 될 수 있고 이 나라를 지도할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조금씩 깨어나 공창폐지운동에 참여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사상이 소설의 핵심사상이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도 사재를 털어 ‘박애원’을 설립해 윤락여성들을 돕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인신매매 금지령이 포고되자 유곽의 여인들이 자유인이 되어 거리로 나왔지만…그날부터 재워주는 곳도 먹여주는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어요. … 전과 마찬가지로 여인들은 빚을 얻어 쓰고 포주는 여인을 착취하고 유곽은 훌륭히 부활을 하였지요. 공창 폐지 연맹이 조직된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공창을 폐지하자 그러나 공창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자는 데 우리 연맹의 목적이 있는 거야요.”(‘화려한 지옥’중에서)
 
작품엔 공창 폐지 문제뿐 아니라 기독교 정의 구현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물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으며 기독교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사랑의 본질을 다룬다. 주인공 채옥이 탈출과정에서 겪는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수난사이다.
 
그의 작품은 해방기 공창제 폐지운동을 입법화하기 위해 쓰인 ‘화려한 지옥’ 외에도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피란의 현실적 전개과정을 정확히 재현하는 가운데 작가의 우익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별들의 고향’, 피란살이의 고단함을 그린 ‘태양의 권속’ ‘옥합을 열고’, 돈과 사랑의 대립구도에서 연애의 사회성을 살핀 ‘푸른날개’ ‘생명’ 등 장편 25편, 단편 100여편에 달한다.
 
그는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로 시작하는 가곡 ‘그네’의 작사가이다. 작곡가 금수현은 그의 사위이고 금난새가 외손주다.
 
김말봉에게 57년은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는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남성들과 평등하게 대우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30년대부터 여성장로 안수제도를 추진해 마침내 57년 12월 18일 서울 성남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장로였다. 또 그해 한국 여성 최초로 대한민국예술원회원으로 피선됐다.
 
[김말봉처럼 생각하기]


 
“소설가인 내게 어머니의 이야기와 자라면서 얻은 성경 지식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나에게는 신구약 성경만이 유일한 독서의 대상이었다. 구약에 쓰여 있는 허다한 이야기의 전부는 하나님을 순종하면 잘되고, 거역하면 멸망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였다. 다윗의 ‘시편’은 그대로 나의 정서를 길러주었고 솔로몬의 ‘잠언’과 철학적인 ‘전도서’ 그리고 색채와 향기가 넘치는 ‘아가서’는 모두 내가 열 살 내외에 읽은 글들이었다. 신약은 열두 살 때부터 정독하여 정신학교에서 4년간 수신 과목 대신으로 성경을 가르치는데, 나는 항상 성경에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내가 오늘날 소설가의 말석에 참여하게 된 것은 따져보면 어릴 때 들은 어머니의 이야기와 자라면서 얻은 성경 지식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다.”(‘나의 문필 생활과 유년기’ 중에서)
 
김말봉 문학의 원천은 성경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한글을 깨우치면서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이후 미션스쿨 소학교를 다니며 많은 종교적 감화를 받았고 일신여학교를 다니며 기독교 교육과 애국정신을 고취했다. 그런 이유에서 김말봉의 소설은 기독교 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흥미 중심의 오락적 이야기보다 한 시대의 사회적 풍조를 파헤치고 그 속에 내재한 비리와 모순을 발견했다. 또 이를 다시 극복해내는 의지의 인간상을 형상화했다. 여성의 인권운동과 사회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한 그 힘은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대로 사는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됐다. 그의 소설은 통속소설이 빠지기 쉬운 저속성을 극복하고 오히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쌓아온 기독교적 신앙이 그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부산=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