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광인 목회’로 평신도 일으켜 교회를 개혁하다


옥한흠 목사


옥한흠 목사가 별세하기 직전까지 읽었던 성경. 국제제자훈련원 제공


옥한흠 목사가 1973년 당시 성도교회 전도사 시절 대학생들을 상대로 제자훈련을 하고 있다.
사랑의교회 개척 초기인 82년 제자반 졸업식 모습. 생전에 옥 목사가 작성한 제자훈련 강의안(왼쪽부터).
옥 목사는 평생을 ‘제자훈련의 광인’으로 살았다. 국제제자훈련원 제공
 


종교개혁은 만인에게 성경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자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영적 무지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개혁의 근본사상이다. 사제 중심의 교회로부터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의 전환을 뜻한다. 종교개혁의 큰 열매인 한국교회가 여전히 목회자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목회 패러다임을 성도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광인(狂人)처럼 제자훈련에 일생을 바친 전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옥한흠(1938∼2010) 목사이다.
 
“미쳐야 예수님의 제자를 만듭니다”
 
지난 3∼7일 경기도 안성의 한 수양관에서는 장장 106회를 이어온 특이한 세미나가 열렸다. 1986년 옥 목사가 시작해 87회를 계속해오다 후임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에 의해 이어지고 있는 ‘평신도를 깨운다’는 주제의 제자훈련이다. 한 주제의 세미나가 30년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것은 종교개혁 500년 역사상 드문 사례다. 그것도 해를 거듭할수록 전 세계로 외연이 확장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올해는 중국과 인도 러시아 미국 호주 등 12개국 205개 교회에서 350여 명의 목회자들이 모였다. 옥 목사가 그의 ‘광인론(狂人論)’에서 “미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 수 없다”고 고백한 것처럼 평신도를 깨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광인 목회’의 열매이다. 이러한 옥 목사의 열정에서 우리는 “만일 내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해 그러하다”(고후 5:13)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본다.
 
봄이 오면 일제히 꽃이 피듯 성령의 계절도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그렇게 오는 것 같다. 한국교회가 연합해 민족복음화의 노래를 불렀던 1970년대와 80년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성회를 개최할 때 강남의 어느 개척교회에서는 무명의 한 목회자가 평신도 제자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광장과 교회는 서로 다른 장소였지만 같은 시기에 일어난 동일한 영적 사건이었다. 한 곳에는 출애굽의 광야처럼 대군이 모였고, 다른 한 곳에는 마가의 다락방처럼 소수가 모였다. 성령의 계절은 그렇게 입체적으로 이 땅에 임했다.
 
옥 목사가 평신도 훈련사역을 시작한 것은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기 5년 전인 1973년, 성도교회에서 대학부를 맡던 전도사 시절이다. 당시 그는 대학생들이 기성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선교단체로 빠져나가는 것이 고민스러워 그 원인을 살펴본 결과 선교단체에는 기성교회에 비해 세 가지 강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바로 ‘복음’ ‘훈련’ ‘비전’이었다. 이는 지역교회와(church)와 선교단체 공동체(para-church)의 차이이자 한계 같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그는 12명의 대학생과 함께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가지고 제자훈련의 첫발을 내디뎠다.
 
얼마 후 그는 제자훈련의 방법론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197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칼빈대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78년 귀국, 그해 7월 강남에서 강남은평교회(사랑의교회 전신)를 개척했다. 옥 목사는 유학 중 한스 큉의 ‘교회론’을 통해 왜 평신도를 제자로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었고, 평신도를 제자로 키우는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평신도 제자훈련에 미치다
 
그러나 평신도 제자훈련은 쉽지 않았다. 정규교육을 받는 학생도 아니고, 대다수 가정과 생업에 종사하는 기성세대들인지라 이러한 형편의 평신도를 예수의 제자로 양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한동안 그의 제자훈련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미치기로 작정한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금식과 기도로 매달린 그의 도전은 결실을 맺어 성도들이 영적으로 점차 변화돼 갔다. 옥 목사는 교회 밖의 집회나 모임을 일절 거절하고 오직 제자훈련에만 집중했다. 처음에는 여자제자반에서 나중에는 남자제자반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제자훈련으로 성도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사명으로 무장하게 되자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제자훈련은 한국교회 안에서 점차 화제가 되었으며, 그것을 도입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제자훈련만큼 설교에 온 힘을 기울여 신자들이 말씀대로 제자의 삶을 살도록 열심히 지도해나갔다. 또 교회와 민족의 장래가 예수의 제자로 훈련된 평신도들에게 있다는 분명한 사명감을 심어주었다. 마침내 84년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제자훈련 전략서가 나옴으로써 옥 목사의 제자훈련은 절정을 맞게 된다.
 
이 책은 그가 임상실험처럼 적용한 제자훈련의 이론과 실제를 담은 노작(勞作)으로 현재까지 100쇄 이상을 출판한 장기 스테디셀러이다. 영어를 비롯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벵골어 에스토니아어 등 8개국 언어로 번역돼 해외 여러 나라로 평신도 제자훈련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는 일제 강점기인 1938년 12월 5일 경남 거제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많은 사경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았으며 초등학교 3학년 때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고향 지세포 대광중학교 시절 수련회에서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투병생활을 하기도 한 그는 1968년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평신도 제자훈련의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3년간 미국에서 유학했다. 평신도 제자훈련에 일생을 바친 옥 목사는 조기 은퇴의 모범을 보였고, 71세를 일기로 2010년 9월 2일 너무나 일찍이 우리 곁을 떠났다.
 
성도에게 한국교회의 미래 있다
 
옥 목사의 평신도 제자훈련 사역은 한국교회 제2의 종교개혁의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목회자 중심의 많은 교회들이 평신도라는 양질의 영적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점에서는 평신도가 깨어나지 않는 것이 목회자에게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고는 반개혁적이다. 만인이 성경을 읽고 만인이 복음 증거자가 되고 만인이 제사장의 사명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 개혁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한국교회는 평신도를 제대로 깨우지 못한 과오를 회개하고 더욱 적극적인 개혁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다. 사랑의교회 오 목사는 “직분이 아니라 사명으로 일하는 교회에서 평신도의 사역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전임자의 제자훈련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옥 목사는 2007년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성회’에서 ‘주여, 살려주옵소서!’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한국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만이 살 길입니다. 100년 전 하디 선교사가 하던 회개, 길선주 장로가 하던 회개를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여,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글 김성영 목사 (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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