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깨어진 순수, 파괴된 청춘의 비극



전후 한국사회는 전쟁의 후유증을 극심하게 앓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되었고 가치의 혼란과 무력감, 바닥없는 절망과 피해의식은 시대의 정신을 지배했다. 한편으론 미국 소비주의의 영향으로 퇴폐와 향락이 만연했고 절망과 허무를 자양분 삼아 실존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참혹한 전쟁의 상처가 있었다. 이 시대의 문학은 그런 절망과 허무의 황폐 한가운데서 자라나온 상처의 문학이다. 예컨대 대표적인 전후작가인 손창섭의 소설에서 전쟁의 상처는 기괴하게 뒤틀린 인물들의 모습에 새겨진다. 그들은 모두 팔 다리를 잃었거나 정신병자가 아니면 폐병환자 간질병자 등으로,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망가진 인간들이다. ‘비오는 날’ ‘혈서’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소설은 저 망가진 인간들의 자기모멸과 혐오로 가득하다.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것만이 일상의 전부인 무가치한 삶을 마지못해 이어가는 인간들. 손창섭이 볼 때 그들은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들이고, 심지어는 ‘박테리아’(미해결의 장)다.
 
전후 신세대작가인 손창섭은 전쟁의 살육과 참화를 겪은 당대 젊은이들의 의식을 지배한 허무와 마음의 폐허를 그렇게 기괴한 방식으로 대변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이 절망적인 상처의 아픔을 딛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당대의 많은 작가들을 사로잡은 질문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겠다. 그리고 ‘별’과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후의 막바지에 발표된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그 질문에 대한 조심스러운 문학적 응답이다.


영화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 현태로 분한 이순재가 술집을 들어선다. 현태에게 술은 삶의 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매개체다.
1960년 출간된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책 표지(오른쪽 위). 이 작품이 실렸던 ‘사상계’(오른쪽 아래).


왼쪽 사진부터 영화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포스터. 성(性)이 폐허의 돌파구임을 암시하는 자극적인 카피가 작품의 초점을 상업주의적으로 왜곡한다.
1950년대 이화여대 앞 풍경. 혼란한 상황에도 공부는 계속되었다. 전후 서울의 어느 하루 풍속도를 그린 영화 ‘서울의 휴일’의 한 장면.
그래도 누군가는 즐거웠고 일상은 그렇게 계속됐다.    한국영상자료원·필자 제공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전쟁의 상처에 짓눌려 자기를 죽음과 파괴의 지경으로 몰아가는 젊은이들의 절망과 방황을 그린 소설이다. 1960년 출간된 이 작품은 1968년 이순재와 문희가 주연을 맡아 영화화되기도 했다. 전쟁을 겪고 난 젊은이들의 방황과 소외라는 주제에 매료되었다는 감독 최하원의 회고는 당시 이 작품이 지녔던 호소력을 잘 설명해준다.
 
소설은 이렇다. 1953년 휴전을 전후한 시점, 전장에 내몰린 순수한 청년 동호가 주인공이다. 그는 오직 생존을 위한 냉정함과 민첩함만이 요구되는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고 온 애인 ‘숙’과의 순결한 사랑만을 애타게 갈망한다. 그런 그가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의 비인간적인 생존논리에 적응하지 못했던 건 당연지사. 마침 그런 동호의 병적인 결벽성을 비웃던 동료 현태는 그를 타락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술집 작부와의 잠자리를 권유한다. 결국 동호는 현태의 장난에 휘말려 작부 옥주와의 육체적 관계와 빠져들고,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옥주의 방에 총기를 난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동호가 그렇게 죽고, 전쟁이 끝난 후 현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현태는 동호와는 상반되는 냉정하고 현실주의적인 인물이다. 그는 작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무고한 여인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해하고 순수한 동호를 타락시켜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전쟁의 상처를 피해가진 못한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에 복귀해 살아가던 현태는 어느 날 우연히 아이를 안은 여인을 보고 난 후부터 자신이 전장에서 살해한 여인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죄의식의 고통을 잊기 위해 술과 여자에 빠져 자신을 극단적인 권태와 허무의 구렁으로 몰아가던 그는 결국 한 여자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구속되는 파국을 맞는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부각하는 것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깨어지고 파괴되는 청춘의 비극이다. 황순원은 소설에서 젊은이들을 짓누르는 상황의 압박을 “두꺼운 유리”라는 상징으로 압축한다. 그들은 시종 “엄청나게 두꺼운 유릿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에 억눌린다. 그래서 그들은 숨 막히고 불안하다. 순수한 내면을 지닌 인물인 동호도, 그의 결벽성을 비웃었던 현태도 그렇게 모두 스스로를 죽음과 파멸로 몰아간다. 전쟁은 그렇게 청춘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남자들은 죽거나 파멸하고 여자만 남는다. 그녀는 죽은 동호가 그리워하던 애인 숙이다. 그녀는 전장에서 복귀해 방황하던 현태에게 겁탈당해 원치 않는 임신까지 하게 된 터다. 숙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파괴된 남자에게 또 다시 파괴당하는 또 다른 피해자인 셈이다. 황순원은 남자들이 죽음과 방탕으로 무책임하게 방기해버린 상처의 극복이라는 전망을 그런 숙에게서 찾는다. 그녀는 현태의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어려운 결심을 하는데, 그것은 상처를 자기 것으로 끌어안고 감당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주어진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끌어안는 책임의식. 황순원은 거기에서 상처의 치유와 극복의 가능성을 찾았던 셈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읽으면 이 휴머니즘적인 결론은 어딘가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결론은 당대에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과 호소력을 발휘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다.
 
황순원은 해방 이전에 등단한 구세대 작가였다. 당시 젊은 신세대 작가들이 6·25를 원초적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반면, 기성세대로서 전쟁을 체험했던 황순원은 그와는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었다.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이 작품이 시대의 상처를 앓는 청춘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동호와 현태는 어찌 됐든 전쟁의 희생자들이지만, 작가는 그들의 죽음과 파멸을 단지 전쟁이라는 외부적 요인에서만 찾지 않는다. 원인은 그들 내부에도 있다. 무엇보다 동호는 자기만의 환상에 몰입해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고 대처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이다. 겉보기에 그와 판이한 캐릭터인 현태는 또 어떤가. 그 또한 과도한 자의식에 탐닉해 상처를 회피하고 타락해간다는 점에서 나약하긴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비겁하고 나약한 자들이다. 마침 숙도 그 둘 모두를 “자기 자신에게서도 피하려고 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는 참이다.
 
이렇게 황순원은 젊은이들을 절망과 방황으로 몰아간 전쟁의 파괴적인 영향에 비판의 화살을 겨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현실의 압박에 성숙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현실 과장과 과도한 자의식을 문제 삼는다. 이 소설 이전에 황순원은 방황하는 젊음에 대한 그런 식의 비판적 시각을 단편 ‘내일’(1957)에서 화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발설한 바 있다. 실존주의의 유행에 휩쓸리는 전후의 신세대들을 향한 발언이다.
 
“그대들이 말하는 불안이니 절망이니 하는 어구들이 불행하게도 내게는 아무런 실감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들이 말하는 어구들이 아직 그대들 자신에 의해 육체화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분명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인물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허무주의적인 자의식 과잉에 빠져 방황하며 삶의 진실과 몸으로 맞서기를 회피하는 현태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바로 그렇다. 구세대로서 황순원은 전후의 절망하는 청춘들을 나름으로 이해하면서도 아마도 그들이 짊어졌던 불가피한 미성숙과 거기서 오는 들끓는 동요를 깊이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의 기성세대들이 고통 받는 청춘 앞에서 맞닥뜨리는 어쩔 수 없는 난관과 딜레마 또한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전쟁의 파괴성과 청춘의 방황을 묘사하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서술은 어딘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 응축된 구세대의 현실 진단은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그중에서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당하면서 그 속에서 개선과 치유의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지점이 특히 그렇다. 그것은 주어진 현실의 책임을 감당하는 건강한 보수주의의 시각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보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오늘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읽어야 할 이유다.
 
<문학평론가 김영찬>
 
황순원은… ‘카인의 후예’ ‘소나기’ 등 주옥같은 작품들 남겨
 

황순원(1915∼2000)은 1931년 시 ‘나의 꿈’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34년 첫 시집 ‘방가(放歌)’를 출간했다. 37년 ‘거리의 부사(副詞)’라는 소설로 창작의 장르를 옮긴 후 삶의 한 단면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서정적인 단편을 주로 발표했다. 이후 단편집 ‘목넘이 마을의 개’(1948), ‘기러기’(1951), ‘곡예사’(1951), ‘학’(1956) 등에서 특유의 서정성을 보여주는 단편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해방기를 거치면서부터는 장편소설을 통해 격동기 한국의 구체적인 현실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우직하고 순박한 여인 곰녀의 삶을 통해 일제 말기와 해방 직후의 현실을 그린 ‘별과 같이 살다’(1950), 북한의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해방 후 북한사회의 혼란상을 그린 ‘카인의 후예’(1954) 등이 대표적이다. ‘별’ ‘소나기’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서정적 단편미학을 구축한 그는 장편의 영역에서도 ‘인간 접목’(1957),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4), ‘움직이는 성’(1973), ‘신들의 주사위’(1982)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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