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수도원 공동체 영성으로 한국교회를 일깨운 ‘벽안의 성자


1975년 대천덕 신부의 아들인 대영복(벤 토레이) 신부의 결혼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작은 딸 버니, 며느리 엘리자베스, 대영복 신부, 현재인 사모, 대천덕 신부,큰 딸 옌시. 예수원 제공


강원도 태백시 예수원 야경으로 3월 말에도 함박눈이 내린다.
‘기도와 노동’을 중시하는 수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예수원 제공
 

‘나의 신앙이 너무 세속에 물들어 있지 않은가’ ‘영혼의 고향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버린 것은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는 성도라면 찾고 싶은 곳이 예수원일 것이다. 일찍이 수도원 공동체운동을 전개하면서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를 통해 보여준 대천덕 신부(1918∼2002)의 청빈한 삶은 세속화시대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순수, 바로 그것이다.
 

대천덕 신부 (1918 - 2002)


한국교회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1980년 8월 11일부터 엿새 동안 진행된 ‘80세계복음화대성회’가 끝난 직후, 대회장 김준곤 목사를 비롯한 교회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성회는 1970년대 초 한국에 임한 성령의 불이 전 세계로 확산된 종교개혁사상 최대의 집회이자, 한국교회의 위상을 드높인 행사였다. 그랬던 만큼 교계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고무되어 있었는데 어떤 분이 “나는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행복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그때 그 자리를 조용히 지키고 있던 한 분이 일어서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일은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그가 바로 대천덕 신부였다. 그는 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에 이어 74년 엑스플로 성회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한국교회가 그 절정인 80년 성회의 결과에 만족하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교회가 자만하면 성령의 역사가 떠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과연 벽안의 성직자가 우려한 대로 80년대 초까지 급성장한 한국교회는 내적 분열과 외적 도전에 직면하면서 90년대에 들어 급격한 정체상태에 빠지게 된다.
 
대천덕 신부는 6·25 전쟁 직후인 1957년 이 땅을 찾아와 반세기 가깝게 산골짜기에 은둔하며 이 땅을 위해 기도하다가 2002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세우고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변화시킨 수도원 영성은 지금도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생애 후반부에 추진한 북한복음화를 위한 ‘삼수령 프로젝트’는 그의 아들 대영복(Ben Torrey) 신부에 의해 지금도 외롭게 진행되고 있다.
 
4대에 걸쳐 한국을 위해 헌신한 가문
 
토레이(R A Torrey) 라는 본명보다는 대천덕(大天德)이라는 한국명이 우리에게 더 친근한 벽안의 수도사는 1918년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중국과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00년 동양 최초로 세워진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고 미국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장로교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나 교리적 신념으로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조부 토레이 1세는 ‘성령론’의 대가로 유명한 신학자이자 드와이트 무디와 시카고에서 10년간 동역한 목회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03년 중국 선교여행 중 원산사경회 강사로 초청받은 감리교 여선교사 메리 화이트를 만나 한국을 위해 함께 기도했으며, 이 집회에 참석한 의료선교사 로버트 하디의 강력한 성령체험과 회개로 원산대부흥운동이 시작되어 1907년 평양부흥운동으로 확산됐다.
 
이처럼 한국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토레이 1세는 1924년 한국을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이 최근 빌리 그레이엄 기념관 자료에서 밝혀졌다. 토레이 2세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2차 세계대전 때 장애를 입고 1952년 한국에 와서 의수족 재활프로그램을 개발, 장애인들을 도왔다.
 
1957년 한국에 온 대천덕(토레이 3세) 신부는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섬겼으며, 지금은 아들 대영복(토레이 4세) 신부가 사역을 잇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토레이 가문’은 한국교회 초기부터 지금까지 4대에 걸쳐 한국을 섬기고 있는 유일한 은인이다.
 
북한 복음화를 위한 삼수령 프로젝트
 
국민일보 국내외 수도원 ‘영성답사’ 시리즈로 2004년 3월 예수원을 찾았던 필자로서는 오랜만에 다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대영복 신부와는 구면으로 오랜만에 재회했다. 그가 예수원 사역을 위해 2004년 미국에서 들어왔을 때 모친 현재인(Jane G Torrey) 여사와 함께 필자가 일한 학교를 방문했었다. 그는 당시 부친이 남긴 사역 중 북한선교를 위한 ‘삼수령 프로젝트’에 힘을 쏟겠다고 했었는데, 만나고 보니 말 그대로 북한 복음화 준비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예수원의 ‘삼수령 프로젝트’란 서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낙동강, 동쪽으로는 오십천의 발원지인 태백의 삼수령(三水嶺)에서 북쪽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복음의 강물을 북한으로 흘려보낸다는 영적 통일전략을 말한다.
 
일명 ‘네 번째 강 계획(The Fourth River Project)’이라고도 하는 이 비전을 위해 대천덕 신부는 2002년 뇌출혈로 쓰러졌어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한다. 에덴동산에서 네 개의 강이 발원했듯이(창2:10∼14),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삼수령에서 네 번째 강(복음의 강)이 열리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열망했던 것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대영복 신부는 네 명의 교사와 함께 11명의 북한선교 사역자들과 오전 일과를 마치고 김밥으로 오찬을 나누고 있었다. 지난 7년간 ‘생명의 강 학교’를 졸업한 사역자는 60여명. 10년간 지속된 삼수령 목장에서 노동훈련을 받은 사역자는 500여명에 이른다 한다. 한국교회가 분열하고 있는 시간에도 깊은 산골짜기에서는 소수의 ‘영적 특공대’가 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난하지만 순전한 제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머잖아 통일의 아침을 주시리라.
 
청빈의 영성 본받아야
 
대천덕 신부의 신앙사상은 한 마디로 청빈과 무소유에 있다 할 것이다. 그의 무소유 개념은 물질을 경원시 하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갖겠다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랑의 청빈사상이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레 25:23)는 말씀에 따라 일생 ‘성토모’(성경적인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를 이끈 것도 그의 청빈사상에 연유한다. 세속을 떠나 은거하며 깊은 기도와 명상 속에서 쓴 그의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는 이를 가르쳐주고 있다. “돈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분열을 멈추고 하나 되어 국가와 민족을 바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원 입구에 하사미리 주민들이 세운 추모비에는 평생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다간 대천덕 신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아로새겨져 있다.
 
잃어가는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원을 찾는 한국교회 성도들은 연평균 1만명 내외라 한다. 매일 30여명, 지난 60년간 60만명의 순례자들이 대천덕 신부의 수도원 영성을 체험한 셈이다. 이들이 60만 국군장병과 함께 영적 군대로 이 땅을 지킨다면 조국의 안보는 걱정이 없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남북의 복음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다.” 대천덕 신부가 평생 실천한 구호처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도 기도와 노동(실천)으로 ‘신앙의 순수’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글·사진 김성영 목사 (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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