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청년들 복음으로 깨워 ‘이 땅을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로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집회’ 당시의 빌 브라이트 박사와 그레이엄 목사,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왼쪽부터)가 참석한 군중들을 배경으로 함께 서있다(위).
‘엑스플로 74 집회’ 광경으로 매 집회마다 100만 명이 넘는 성도들과 시민들이 참석했다(가운데).
아래 사진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여름수련회 광경으로 김준곤 목사가 인도하고 있다. CCC 제공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주소서!” 스코틀랜드의 구원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한 존 녹스처럼 유성(遊星) 김준곤(1925∼2009) 목사는 한반도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눈물의 전도자였다. 일본의 징병을 피해 만주 벌판에서 기도하던 중 민족의 살 길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족이 순교를 당하는 비극 속에서 민족복음화의 한을 품게 된 그는 평생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사역을 통해 교회연합을 이뤄 종교개혁사에 민족 단위 복음화의 환상을 현실로 기록했다.
 
‘한민족만이라도 완전복음화를’
 
김 목사는 평생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지상에서 한민족만이라도 완전복음화를 주소서!”는 그의 기도문 일절이다. 그가 일생을 기울인 민족복음화운동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완전복음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 환상의 전도자인 김 목사는 1925년 3월 28일 전남 신안군 지도(智島)에서 출생했다. 그가 최초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은 여섯 살 무렵, 모친을 전도하기 위해 자주 심방한 성결교단의 문준경 전도사를 통해서였다. 그 후 청소년기에 목포의 어느 성당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상(苦像)에 새겨진 진젠도르프의 글귀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나는 너를 위해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
 
그러나 김 목사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20대 초반, 조국을 떠나 만주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였다. 무안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지도원으로 선발되어 만주 마창 지역에서 근무하던 중 일본군의 징집영장을 받게 된 그는 조국을 침탈한 정복자의 징집을 거부하고 도피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조국의 장래와 구원의 문제를 두고 빈들의 야곱처럼 하나님께 매달려 주야로 기도한 그는 민족의 살 길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깨닫고 일생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6·25전쟁 와중 21번 죽을 고비 넘겨
 
김 목사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신학을 공부한 후 경기도 파주에서 목회하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그 와중에 그의 고향 지도는 석 달 동안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어 2만명의 주민 가운데 2000명이 학살을 당한다. 김 목사는 그때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자신도 21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양민들과 가족을 학살한 좌익들이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때, 계엄사령부를 찾아가 선처를 호소하며 그들의 구명을 도운 ‘사랑의 사도’였다.
 
이처럼 처절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복음화만이 민족 구원의 길임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고, 유학 중에 국제CCC 창설자 빌 브라이트 박사를 만남으로써 캠퍼스 선교를 통해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58년 CCC를 설립했다. 김 목사는 전후(戰後) 사상적 혼란기에 대학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간사들과 함께 장기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민족복음화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1962년 겨울, 삼각산에서의 장기금식기도와 1970년 12월 31일 제야 방송을 통한 ‘민족복음화운동 선언’ 등으로 구체화됐다. 그의 캠퍼스 선교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민족복음화인 동시에 ‘세계복음화’였다.
 
그는 ‘오늘의 학원복음화는 내일의 민족복음화’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캠퍼스 사역을 시작했다. 김 목사의 사역은 학원선교를 넘어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북한선교로, 그리고 세계복음화로 그 영역이 계속 확장돼 갔다. 생전에 ‘북한 젖염소 보내기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것도 북한을 포함한 민족복음화를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CCC 초창기였던 1958년 서울 중구 저동의 김준곤 목사 사무실에 걸어두었던 한반도 지도 모습.
지도 위에 ‘오늘의 대학복음화, 내일의 세계복음화’란 슬로건과 대학 현황 등이 표시돼있다. CCC 제공


 
그리스도의 계절을 위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1970년대 이후 이 땅의 크리스천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이 영적 구호는 한국교회가 함께 불러온 민족복음화운동의 노래이자 염원의 기도이다. 이처럼 민족복음화운동의 전개를 대내외에 선언한 김 목사는 이 운동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전국적 민족복음화 요원 훈련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동시에 춘천을 시발점으로 국내외 주요 도시에 성시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과정에 민족복음화운동의 불은 ‘1973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와 ‘엑스플로 74’ ‘80세계복음화대성회’로 확산됐다.
 
특히 엑스플로 74 성회는 매 집회마다 100만명(연인원 655만명)이 넘는 성도들과 시민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운집한 최대의 성령집회로 기록됐다. 엑스플로 74는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을 당하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개최된 집회로 한국교회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 ‘20세기 미스바 성회’였다.
 
이 집회에서 김 목사는 매일 32만명에게 집중 제자훈련을 시켜 세계교회를 놀라게 했다. 이로써 한반도에 떨어진 성령의 불은 한국교회의 대부흥을 가져와 1970년대 초까지 300만이었던 신자가 10년만인 1980년대 초에는 800만을 넘어 1000만 성도시대를 열게 됐다. 실로 성령의 강력한 폭발(explo)이자 이 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로써 민족복음화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온 교회와 성도들이 경험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개교회 중심의 ‘개인구원’이라는 소극적인 전도로부터 연합을 통한 ‘사회구원’이라는 적극적인 전도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김 목사는 1965년 대통령 초청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해 각 영역의 지도자 전도의 길을 닦았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 “일생 예수의 마음을 품고 민족과 세계를 위해 봉사한 위대한 전도자”라고 김 목사를 평가했다.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에 더욱 힘써야
 
한국교회가 대부흥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것이 바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비판론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양적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상대적으로 내적 성숙을 이루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그러나 교회로 하여금 외적 성장과 내적 성숙 중 그 어느 한 편을 택하라는 이분법적인 요구는 성경적이지 않다.
 
교회는 외적으로도 성장해야 하고 내적으로도 성숙해야 한다. 그 어느 쪽을 취하고 버릴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전도해야 하고(딤후 4:2), 거리와 산울타리로 나가 많은 영혼을 불러야 한다(눅 14:23). 동시에 성도들을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딤후 3:17). 교회는 웨슬리처럼 전도하고 칼뱅처럼 양육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다시금 민족복음화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매일 오후 1시에 1분간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자고 호소한 김 목사는 2009년 9월 29일 오전 11시 11분 85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김 목사가 남긴 민족복음화의 꿈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는 CCC 대표 박성민 목사의 결의는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의 향후 과제이기도 하다.
 
 
글·사진=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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