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누구에게나 ‘빙점’, 하나님은 항상 손 내밀고 계신다

1964년 7월 10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잡화점의 주부, 깊은 밤 계속 글쓰기 1년’이란 큰 제목으로 한 평범한 주부의 혜성 같은 문단 등단을 전했다. 창사 85주년 기념 1천만엔 현상 장편소설에 미우라 아야코(1922~1999)의 ‘빙점(冰点)’이 당선된 일을 전한 것이다. 42세의 그는 당선 통보를 받고 기쁨과 흥분에 휩싸였지만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 드렸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로 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설원.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은 아사히카와 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다.


“내면의 점점 커지는 빛, 이 기쁨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글을 쓰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생애 목표로 삼겠습니다.”
 
복음화율이 1%에 지나지 않는 일본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미우라 아야코는 문학을 통한 복음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인간의 참된 삶과 기독교 신앙을 담은 문학세계를 열었다. 그는 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96편의 소설을 썼다. 죄와 고난을 통해 거듭나는 삶을 담았다. 그의 작품을 읽고 신앙을 갖게 된 한국인들도 수없이 많다.
 
대표작 빙점은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회개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최후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품에 담긴 작가의 목소리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을 적셨다. 지난달 14일 빙점의 무대인 일본 훗카이도 아사히카와 ‘외국수종 견본림’과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을 찾았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눈을 뜨니 설국(雪國)이었다.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로 향하는 JR기차는 끝없이 펼쳐진 산간 지역과 평야를 2시간30분간 달렸다. JR 아사히카와역 동쪽 출구로 나와 빙점 다리를 건너 20분정도 걸어가면 소설 빙점속의 요코가 거닐던 견본림을 만날 수 있다.
 
 
아사히카와 ‘외국수종 견본림’ 입구. 숲길을 걸어 들어가면 제방과 비에이 강을 만날 수 있다.


견본림은 훗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된, 외국 침엽수를 주로 심은 인공림이다. 방쿠스 소나무, 독일 가문비, 유럽 적송 등 10여종의 나무숲이 커다란 삼림을 이루고 있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숲길을 걸어 이시가리 강의 지류인 비에이 강에 도착했다.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에서 루리코가 유괴당하고 죽임을 당한 곳이다.
 
“요코는 한 걸음 한 걸음 깊은 눈 속을 걸어오느라고 몹시 지쳐 있었다. 간신히 숲을 빠져 나오니 비에이 강의 푸른 물결이 아름답게 보였다. 강바람이 뺨을 때렸다. 요코는 강을 건너 루리코가 죽임을 당했다는 강변에 도달했다. 요코는 조용히 눈 위에 앉았다. 아침 햇살에 눈이 반짝여 엷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 속에서 죽을 수 있다니.’ 요코는 눈을 꽁꽁 뭉쳐서 강물에 적셨다.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칼모틴을 삼켰다. 몇 번이나 눈을 뭉쳐 강물에 적셔서는 입에 넣은 다음 또 약을 삼키고 했다.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면서 죽게 될까.’ 만일 괴로움을 당해 죄가 없어질 수 있다면 아무리 괴로워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면서 요코는 눈 위에 드러누웠다.”(빙점 중에서)

아야코 문학에 의하면 빙점 안에는 사랑 원망 증오 복수 용서 등이 살아있으며, 인간 누구에게나 이러한 순간 얼어붙는 빙점이 존재한다. 인간 내부엔 이런 빙점, 원죄(原罪)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빙점은 ‘원죄 의식’과 함께 ‘인간은 어디까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란 윤리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 전경과 내부에 전시된 작가의 저서와 육필원고


병원장 게이조는 평상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로 인격자였다. 그러나 외도한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복수하기 위해 딸의 생명을 앗아간 범인의 딸 요코를 입양한다. 아내 나쓰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요코를 애지중지 키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일기장에 적힌 요코의 태생을 알게 되면서, 요코를 증오하고 학대한다. 요코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학대를 참고 견디며 아름답게 성장한다. 그런 모습에 반한 오빠 친구 기타하라의 구애를 받자, 나쓰에는 요코가 유괴살해범의 딸임을 말하며 결혼을 막는다. 사실을 알게 된 요코는 그 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음독, 혼수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요코가 유괴살인범의 딸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나쓰에는 속죄의 눈물을 쏟는다.
 
빙점의 대략적 줄거리다. 요코의 마음에도 빙점이 있었다.
 
“저의 마음은 얼어붙었습니다. 요코의 빙점은 ‘너는 죄인의 자식’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남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어린 아이 앞에서도, 죄 많음을 알고 살아나갈 때야말로 참된 삶의 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빙점 중에서)
 
자신이 유괴범의 딸이란 사실을 알고 죽기로 결심한 요코가 쓴 유서의 일부 내용이다. 요코는 유괴살인범 딸이란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는 요코의 잘못이 아닌, 대물림이다. 이러한 원죄의식에 요코는 괴로워한다. 소설의 초점은 요코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 요코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권위자’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빛·사랑·생명

견본림 옆에 갈색과 흰색을 바탕으로 한 12각형의 2층 목조건물이 있다. 아야코를 사랑한 독자들이 전국적으로 기금을 모아 그가 작고하기 1년 전인 98년에 세워진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이다. 그녀를 사랑한 독자 1만5000여명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금액은 2억엔에 달했다. 전시실은 ‘빛 사랑 생명’이란 테마로 그녀가 걸어온 길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를 만나러 세계 각지에서 연간 1만 5000여명이 문학관을 찾고 있다.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 내부.


문학관엔 작품과 번역본을 포함한 200여권의 저서, 작가의 출생과 교사생활, 투병생활과 결혼, 작가가 되기 이전의 발자취가 전시돼있다. 또 문학의 출발점이 된 소설 빙점에 대한 작품해설과 시대적 배경 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했다. 작가의 작품세계와 부부의 신앙생활을 담은 자료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미우라 아야코는 재직하는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맞는다. 천황은 신이라고 가르쳐온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그만둔다. 가치관의 상실로 인한 허무감으로 이중 약혼을 한다. 그런 그에게 마치 벌이라도 내리듯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이 찾아왔다.
 
46년 6월 1일 갑작스런 고열로 병상에 누운 그는 ‘무엇 때문에 인간이 사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인생에 무슨 확실한 기쁨이 있을까’라는 상념으로 빈 집처럼 스산하고 허무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깁스베드에 누워 지내던 그는 손거울을 통해서만 창밖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천장을 바라보며 죽음의 공포와 싸웠다. 24세부터 결혼하기 전 37세까지 13년 동안 침대 위에서 지낸 셈이었다. 어떻게 그가 병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미우라 아야코가 생전 남편 미우라 미쓰요 씨와 서재에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


병상세례 후 모든 게 달라졌다. 52년 7월 5일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우라 아야코는 세례를 받은 후 성경을 읽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특히 하나님 앞에 노출된 인간의 죄에 주목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간의 죄 많은 모습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높고 맑은 사랑을 아는 것이었다. 병상의 습작은 등단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세례 받는 날을 경계선으로 확실히 변했다. 마음속에서 밝은 빛이 커져가고, 그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기쁨을 갖게 됐으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은 종일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자 하나님 쪽을 보세요. 당신은 이제 고민할 것도 눈물을 흘릴 일도 없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답니다.”(자선소설 ‘길은 여기에’ 중에서)
 
복음 증명의 문학

“만일 나에게 성경이 없었고 알지 못했다면 지금쯤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성경으로 비춰본 내 자신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상처뿐이며 추악한 것이다. 그처럼 보잘 것 없고 추악한 상처뿐인 나를 용서해 주고 사랑하며 받아들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작품에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미우라 아야코와 남편 미우라 미쓰요가 함께 출석했던 아사히카와 로쿠조교회 전경.


생전에 그가 이렇게 말해왔듯이 그의 작품엔 자전적 성격과 복음 증거의 내용이 많다. ‘빛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곳에’ 등의 작품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랑을 베푸시고 있는지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복음 증명의 문학’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문학관에서 나오니 빙점 속 게이오 원장이 살았을 듯한 단층주택들이 보였다. 또 요코가 아사히카와 시내로 나갈 때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요코가 다니던 초등학교 등 작품 속의 장소들이 견본림과 시내 중심에 있는 기차역, 시외버스 터미널 사이에 거의 모두 있다.
 


-나가모토 아유미 문학관 학예사와 ‘빙점’-
“살다가 지치고 슬플 때 읽기를 권합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젊었을 때 고독과 허무를 경험하고 자살을 꾀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암담한 시기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존재, 즉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둘도 없는 존재’란 사실을 소설과 수필을 통해 계속 전파해 왔습니다.”
 
지난달 14일 일본 훗카이도 아사히카와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에서 만난 나가모토 아유미 학예사는 “소설 ‘빙점’은 일본에서는 소수에 속하는 크리스천인 미우라 아야코가 전도를 위해 쓴 썼다고 공언한 것 때문에 일본 현대문학계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빙점은 ‘속(續) 빙점’을 포함해 일본에서 800여만부 이상 팔렸고, 2013년에는 가도가와(角川) 발행문고의 ‘필독명작’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작가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더 많아지고 있어 문학관에서는 미우라 아야코의 문학을 소개하는 기획 전시와 콘서트를 하고 있으며, 미우라 아야코 문학과 관련 있는 지역을 돌아보는 안내버스도 운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살다가 지치고 슬플 때 미우라 아야코의 책 읽기를 권했다. “아야코가 좋아했던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란 말씀이 꼭 생각날 것입니다.”
 
아사히카와(일본)=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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