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박재찬] 가보지 않은 길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굵직한 뉴스들로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산다. 바닷속에서 건져 올려진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배 안에서는 또 어떤 뉴스와 사연이 쏟아져 나올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고, 그걸 바라봐야 하는 유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의 심정을 헤아리니 ‘아이고’ 탄식부터 나온다. 결국 영어의 몸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 소식도 한참을 들여다봤다. ‘박정희의 딸’ ‘첫 여성 대통령’ ‘첫 파면 대통령’ ‘구속’이라는 뉴스 타이틀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면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그의 이력들이 초라해 보인다. ‘8세 여아 유괴·살해’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가 하면 ‘술 먹다 죽어보자’며 소주 62병을 나눠 마시다 정말 목숨을 잃어버린 40대 여성은 또 어쩌란 말인가.

나라님을 잘 뽑자. 기막히고 속상한 뉴스들 속에서 불쑥 드는 생각이다. 대통령 탄핵과 더불어 조기 대선 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지금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새로운 국가 지도자를 선택할 시간도 3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대선 후보들은 장밋빛 전망 가득한 공약집과 그럴듯하게 포장한 캐치프레이즈로 유권자들을 유혹할 게 뻔하다. 진보·보수 진영은 저마다의 이익과 노선에 따라 합종연횡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만들어놓은 선거 전략과 정치공학적 프레임 속에서 스스로의 판단은 중단한 채 스윽 한 표를 던지고 마는 건 아닐까. ‘그러면 또 당하고 말 텐데.’ 나 자신부터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습니다.” 지난해 11월 4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일파만파 퍼질 때 마지못해 국민 앞에 선 박 전 대통령의 다짐이었다. 앞으로 사적인 관계에서 빚어질 수 있는 작은 부정부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40년 지기 최씨에 대한 배신감에서 나온 결기어린 다짐이었건만 수긍보다는 씁쓸한 마음이 앞섰다.
 
부대끼고 설득하고 싸우고 돌이키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세상만사가 모두 관계에서 비롯되는 일일진대 일국의 대통령 입에서 단절과 고립을 자초하는 말이 튀어나오다니. 이후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뒤에도, 특검과 검찰 조사에서도 승복의 자세 대신 꼿꼿함으로 일관한 그의 모습에서 내가 기대했던 대통령의 처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은 돌이킬 줄 알고, 두루 아우를 줄 아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
 
누구나 실수도, 잘못도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흠 없이 임기를 마무리한 이들이 어디 있을까. 조물주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연약하고 부족하며 허물 많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잘못이 있으면 돌이켜 뉘우치고 고치는, 즉 회개할 줄 아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과오를 돌이킬 줄 아는 지도자는 화합을 중요시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이쪽저쪽을 아우르고 설득해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려고 힘쓰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임시정부 내부에서 잡음이 나거나 분열의 기미가 있다 싶으면 달려가서 양쪽을 설득하고 화해시키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도산일기에도 ‘오늘은 누구를 설득하고 누구누구의 싸움을 막으려고 찾아다녔다’는 일화가 종종 등장한다.
 
촛불과 태극기로 찢기고 갈라진 작금의 민심과 갈등사회를 치유하려면 동그라미 같은 화합형 지도자가 절실하다. 청와대 관저 주변에만 머물러 있을 게 아니라 구석구석 부지런히 다니며 상처받은 민심을 찾아 보듬어주면 좋겠다. 행여 임기 중에 실수나 잘못을 했더라도 회과천선(悔過遷善)할 줄 아는 겸손함과 용기를 품은 지도자 또한 보고 싶다. 이런 덕목을 지닌 후보를 고르기 위한 유권자들의 안목이 중요하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우리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준비일 것이다.
 

박재찬 종교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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