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대학 캠퍼스를 ‘믿음의 모판’ 삼아 한평생 세계복음화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서울 집회 광경.
1970년대에는 100만명 이상 참석하는 대규모 부흥집회가 여러차례 열렸다.


국제대학생선교회(CCCI) 첫 해외 선교지로 한국대학생선교회가 설립된 1958년 당시 빌 브라이트 박사와
한국 대표 김준곤 목사.
평생 전도했던 브라이트 박사가 대학생들에게 전도하고 있다(왼쪽부터).


빌 브라이트 박사 (1921-2003)



“브라이트 박사의 삶과 사역은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와 함께 사역한 것은 우리 시대에 큰 축복이다.” 종교개혁 500년 역사상 가장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복음전도자의 한 사람인 빌리 그레이엄이 동역자 빌 브라이트(Bill Bright·1921∼2003)를 회고한 말이다. 현대교회사는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과 평신도 빌 브라이트를 세계복음화의 두 주역으로 평가한다. 대학생선교회(CCC) 창설자 빌 브라이트는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김준곤 목사를 도와 한반도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다.
 
“CCC 첫 해외 선교지로 한국을 맡깁니다”
 
1956년 어느 날, 미국 풀러신학교 교정에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국제대학생선교회(CCCI) 창설자 빌 브라이트였고, 다른 한 사람은 민족복음화의 꿈을 안고 유학 중인 김준곤 목사였다.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이들은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다. 둘은 시간만 있으면 함께 기도했다. 브라이트 박사는 전쟁을 치른 비극의 땅에서 온 김준곤 목사의 신앙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어느 날, 브라이트 박사가 김 목사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1951년 출범한 미국 CCC의 첫 해외 선교지로 한국 사역을 부탁한 것이었다. 당시 국제본부의 규칙으로 한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최초의 외방 선교를 맡긴다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브라이트 박사는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열정에 감동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CCC 본부는 선교지에 자국의 리더를 세운다는 국제사역의 원칙을 정하게 되어 1958년 한국 CCC를 출발점으로 전 세계 192개국에 지부를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파괴된 인간의 심성 치유와 영혼 구령하기 위해 세워진 CCC의 첫 해외 선교지로서 한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것이다.
 
빌 브라이트 박사의 영적 결단의 열매는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서울집회와 1974년 엑스플로 성회, 그리고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로 계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한국에 파송한 김준곤 목사의 CCC 사역으로 한반도 복음화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에 의해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는구한말 혼란기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1907년 평양대부흥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영적 소강상태를 보이던 한국교회가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1970년대를 맞이하여 ‘서울대부흥’의 계절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1973년 서울집회의 주역은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이었지만 평신도 전도자 빌 브라이트 박사가 함께 하고 있었으며, 한국교회를 대표해서는 준비위원장 한경직 목사와 상임위원 김준곤 목사의 헌신이 있었다. 연이어 열린 ‘엑스플로 74’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도 빌 브라이트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 최대의 사건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
 
평소 “인류 최대의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즐겨 전한 빌 브라이트 박사는 1921년 10월 19일 미국 오클라호마 주 코웨타에서 출생했다. 청소년기까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그는 1945년 어머니와 교회의 영향으로 예수를 영접한 후 프린스턴신학교와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노스이스턴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비즈니스맨이었다.
 
1951년 풀러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캠퍼스 선교를 통한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CCCI를 창설한다. 그 과정에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교수로 일하면서 풀러신학교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중 한국에서 온 김준곤 목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빌 브라이트 박사는 풀러신학교 재학 중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 명령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를 두고 깊이 기도하던 중, 미래의 지도자들인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캠퍼스를 모판 삼아 대학 지성인을 복음의 일꾼으로 길러내어 그들을 각 분야로 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세계복음화 전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즉각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 평소 경영하던 사업과 마지막 학기도 중단하고 대학생들의 ‘예수 제자화’ 사역에 바로 뛰어 들게 된다. 그뿐 아니라 브라이트는 자신의 전 재산과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겠다는 ‘양도 계약서’를 아내인 보넷 브라이트와 공동으로 작성해 하나님께 바치고 본격적인 CCC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오직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주님께 양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생을 무소유로 살았다. 이런 브라이트 박사의 삶을 두고 국제갤럽연구소 조지 H 갤럽 박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그의 영적인 파워는 바로 메시지와 실천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평생 복음의 동지였던 김준곤 목사도 “그의 영적인 힘은 사람의 능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 했다.
 
오늘의 학원복음화, 내일의 세계복음화 

빌 브라이트 박사는 자신이 죽기 전에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이 종말론적 사명감은 김준곤 목사와 일맥상통했다. 그의 일생의 영적 구호는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복음화”였다. 이는 미국 CCC의 첫 외방 선교지로 개척된 한국 CCC 창설자 김준곤 목사의 영적 구호와 일치하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김준곤 목사는 학원복음화와 세계복음화 사이에 ‘민족복음화’라는 단계적 전략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빌 브라이트 박사의 ‘학원복음화-세계복음화’의 2단계 선교전략이 김준곤 목사에게는 ‘학원복음화-민족복음화-세계복음화’라는 3단계 선교전략으로 세분화된 것이다.
 
이처럼 빌 브라이트 박사의 사역과 김준곤 목사의 사역이 만난 자리에 한국교회의 부흥이 있었으며,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의 상승작용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꿈꾼 세계복음화는 ‘거의 복음화’가 아니라 ‘완전 복음화’였다. 이는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적극적 전도전략이다.
 
하나님께서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성직자 빌리 그레이엄과 평신도 빌 브라이트 중 한 사람이 대중전도자라면 한 사람은 개인전도자였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100만 성도 앞에서 성령의 불을 토할 때 빌 브라이트 박사는 캠퍼스에서 한 영혼을 붙들고 ‘4영리(四靈理)’ 소책자로 예수를 전했다.
 
그는 잠시 이용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언제나 전도를 했다. 4영리를 전해서 무슨 효과가 있느냐는 회의적인 질문에도 그는 “예수님이라는 말 한 마디를 통해서도 영혼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라는 확신에 찬 대답을 남겼다. 위대한 전도자는 그렇게 지상에서 아낌없이 자신을 다 태웠고 2003년 7월 19일, 그토록 그리던 예수님 곁으로 떠났다. 그가 마지막 남긴 책 ‘The Journey Home’이라는 제목처럼 복음의 여정을 마치고 하늘 집을 찾아간 것이다.
 

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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