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우리를 새롭게 세상을 빛나게

“나를 다그치고 우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다시 세우겠다는 고백이 절실한 때다”
 
봄빛이 완연하다. 때마침 미국에 사는 친구가 자작시를 보내왔다. “골 깊은 얼음덩어리 없애니 비로소 봄이 왔네(除壁氷河春竟來·제벽빙하춘경래)/ 만물이 드디어 자라나니 할 일이 많겠네(萬物始育何作催·만물시육하작최).” 올봄의 감회는 단숨에 바다를 넘나든다.

늘 그렇듯 봄은 마무리이자 시작이다. 꽃샘추위가 아린 것은 이별의 아쉬움과 변화의 뾰족함이 배어 있어서다. 그런데 올봄은 유별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최종 결론을 내림으로써 한 정권의 조기 종결이 강제된 마당이기 때문이다.
 
올봄은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 교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중차대하다. 핵심은 폐습의 청산이다. 헌재는 지난 10일 선고문에서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해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현대사는 꽤나 자랑스럽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재빨리 산업화를 이룬 나라, 개발독재와 신군부 쿠데타까지 뒤로 하고 민주화도 쟁취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도 폐습이 거론된다. 문제는 우리의 고질적인 권위주의다. 이번 사태가 그 증좌다. 일방통행의 권위주의가 헌법질서마저 훼손했다.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의 시작점은 권위주의의 폐기다. 이에 전문가들은 개헌의 필요성과 조기 대선의 중요성을 말한다. 탄핵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투명하고 거짓이 없으며 역량 있는 후보를 고르라고 주문한다. 광장의 민심도 적폐청산에 적잖이 목소리를 높여왔다.
 
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뭔가 모자라는 느낌이다. 상대, 즉 너에 대한 주장만 넘칠 뿐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제기하거나 과거 그릇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려는 주장은 그리 안 보인다. 권위주의체제를 키워온 것도 알량한 기득권에 숨어 숨죽여온 우리였는데 그에 대한 반성은 많지 않다.
 
철저한 자기고백이 없는 국민주권주의는 위태롭다. 1960년 4·19혁명, 80년 서울의 봄, 87년 6월 항쟁 등은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족적이지만 그 이후 벌어진 역코스 행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부끄러운 또 다른 얼굴이다. 역코스 행진은 이제 그로써 족하다. 올봄은 이전과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국민이 맡아야 할 몫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 확산에 달렸다.
 
헌재 결정이 있던 그날 저녁 퇴임을 앞둔 친구와 함께 아쉬움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한 일간지의 대표논객인 그 친구는 불쑥 오래전 결혼 때 은사님의 덕담을 소개했다. ‘평생 아내를 친구의 부인처럼 대하며 살라’고 했다는 것이다. 퇴직 이후를 위한 자기고백이냐며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 제 식구에게는 소홀히 하면서도 친구 부인에게는 깍듯한 경향이 있기도 하니.
 
역코스를 막는 일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내 몫을 감당하는 것이 시작이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출발점이다. 가짜뉴스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함은 물론이다. 시대에 대한 나의 관심과 문제제기가 국민주권 구현의 기본인데 그것은 누구의 강요가 아닌 나만의 결정이라야 한다. 상대를 향해 질타만 하기보다 내가 앞장서 변화를 요청해야 옳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인정에 인색한 우리네 체질도 고쳐야 한다.
 
500년 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자신의 관심을 제기한 데서 출발했다. 그것이 중세교회의 폐습을 바꾸고 사회의 개혁을 불렀다. 이를 기념해 국민일보는 오늘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빛나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제포럼을 연다. 나를 다그치고 우리를 앞세워 대한민국을 다시 세워 빛나게 하겠다는 고백이 오늘만큼 절실한 때가 없다. 우리가 새로워지자. 얼음은 사라졌고 할 일은 정말 많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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