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교회로 영혼구원, 교육으로 무지극복, 봉사로 가난척결


 한경직 목사

제5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시작하며
 
종교개혁 5대 솔라의 마지막 모토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은 개혁의 근본 목적이자 결론이다. 그러기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답은 인간의 제일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가르친다. 5편에서는 현대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한 주요 인물과 사례를 살펴본 후 오늘을 반성하고 향후 개혁 방향을 모색해본다.
 
종교개혁 500년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대부흥을 이룬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건국, 그리고 6·25전쟁의 와중에도 국가와 민족을 지켜낸 구원의 방주로서 그 사명을 다해 왔다. 초기에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복음이 흥왕했던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녘 교회는 공산 무신론자에 의해 강제 폐쇄되고 한반도 복음화의 무대가 서울로 옮겨졌으며 한국교회 재건과 연합의 중심에는 추양(秋陽) 한경직(1902∼2000) 영락교회 목사가 있었다. 그는 ‘교회’로 영혼을 구령하고 ‘교육’으로 무지를 극복하며 ‘사회봉사’로 가난을 물리치자는 목회철학으로 일생을 바쳤다.
 
마포삼열이 세운 미션스쿨서 수학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 믿습니다.” 1885년 부활절 아침, 복음을 들고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 언더우드가 드린 첫 기도의 일절이다. 주권을 상실한 당시 한반도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란 무엇인가. 당장 국권이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 구원을 위한 복음의 은총이었다. 곧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통해 이 땅을 변화시킨 것이다.
평생 겸손과 온유, 청빈과 사랑으로 일관한 한 목사는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온 7년 뒤인 1902년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출생했다. 자작나무가 울창한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8세 때 마포삼열(S A Moffett)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 입학하면서 서구의 신학문과 기독교를 접했다. 1907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성령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국가적으로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병의 치욕을 겪게 된다. 1916년 진광소학교 졸업 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로 진학한 한 목사는 그곳에서 민족선각자 남강 이승훈 선생과 고당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기독교사상과 민족정신을 배웠다.
 
“신자는 마땅히 복음으로 사회 변화시켜야”
 
1919년 한 목사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평양 숭실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이 기간에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일제의 만행으로 제암리교회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한 목사는 평양경찰서 폭탄투척 사건 용의자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국가·개인적 시련 속에서 그는 21세 되던 해 소래 해변에서 “민족을 살리려면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게 된다. 이 영적 사건을 계기로 그의 학문적 관심은 과학에서 신학으로, 삶의 목표는 세상사에서 복음사역으로 대전환을 하게 된다.
 
푯대를 분명히 정한 그는 1925년 숭실대를 졸업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엠포리아대에서 인문학의 기초를 쌓고 프린스턴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1929년 프린스턴을 졸업했으나 결핵으로 3년간 요양생활을 해야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932년 귀국해 신의주 제2교회에서 10년간 목회했으며, 1934년 33세에 안수를 받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기에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작된 새벽기도의 불을 그대로 옮겨간 교회가 바로 신의주 제2교회였다는 사실이다. 영락교회가 개척 수년 만에 장로교를 대표하는 교회로 부흥한 것도 온 성도들이 매달린 새벽기도의 힘이었다. 새벽기도와 관련해 한 목사는 “여름철 벌통 속에서 날개로 부지런히 부채질하는 벌들이 있어서 공기를 순환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부지런히 기도의 부채질로 세상을 정화시켜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편 한 목사는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해 1945년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정당으로 기록된다. 복음으로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그의 적극적인 기독교 문화관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전쟁 직후 행한 설교 ‘신자의 사회적 사명’을 통해 “한 송이 장미꽃은 작지만 향기를 발산하는 것처럼 신자는 마땅히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도덕적 중생과 문화적 발전, 자유와 박애, 평등과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면서 빈곤과 무지에 처한 국민을 향한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시하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한 목사는 이미 60년 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산파역
 
조국 광복의 기쁨도 잠시, 공산주의가 북한을 지배하자 한 목사는 1945년 12월 신앙 동지들과 월남해 서울 저동에 베다니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오늘의 영락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 후 2년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피란민 구호와 전쟁포로 선교활동을 전개했으며, 1951년에는 유엔감사사절단으로 도미해 유엔 참전국에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한 목사는 한국교회 제2부흥의 기폭제가 된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 산파역을 담당했다. 이 집회는 이듬해 연이어 개최된 엑스플로 74성회와 함께 매 집회마다 100만명 이상의 성도와 시민이 운집한 세계교회사에 유례없는 대성회로 기록된다. 이들 집회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당시 300만 성도에서 1980년대 말까지 1000만 성도로 급성장하게 됐다. 하나님은 1907년 평양대부흥에 이어 1973년과 74년, ‘80세계복음화대성회’ 그리고 1984년 한국기독교100주년대회를 통해 남한 지역에 대부흥을 주신 것이다.
 
한 목사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영적 인연은 1973년부터 2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의 와중인 1952년 12월 15일 그레이엄 목사가 이 땅을 찾아와 부산에서 집회를 했는데, 한 목사가 집회를 주선하고 통역을 맡았다. 한 목사는 60여년 전인 1958년 10월 26일 종교개혁기념주일 설교에서 “기독교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 맑은 물을 마시는 신앙”이라며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 정신을 역설한 바 있다. 그의 복음적인 개혁주의 신앙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2년 12월 15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6·25전쟁 와중에 부산을 방문해 집회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가 옆에서 통역하고 있다(오른손을 들고 있음).


1984년 8월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된 한국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 광경.


현재 영락교회 전경(왼쪽)과 6·25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저동 일대와 당시 영락교회 모습(오른쪽).
교회당은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시아인 최초로 ‘템플턴상’ 수상
 
한 목사는 생전에 ‘조국을 위하여’라는 설교를 통해 “1950년 대구 총회에서 교단이 큰 싸움을 하고 분열하더니 그해 6·25가 터졌습니다. 교회분열이 국가적 시련을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오늘날 큰 위기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지도자들과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향한 경종이기도 하다.
 
생전에 “교회는 조국을 위해 느헤미야처럼 울어야 한다”(느 1:1∼11)고 호소한 그의 메시지를 이 시대에 다시 들어야 한다. “하나 되라”(요 17:11, 21∼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에큐메니컬 운동에 일생을 바친 한 목사는 한국교회의 연합을 이뤄 1984년 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을 이끌었으며, 그 열매로 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사분오열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목사는 교회연합과 사회봉사의 공로로 1992년 세계 종교계의 노벨상에 비견되는 ‘템플턴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했으며, 2000년 4월 19일 98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한경직 목사는 예수님을 가장 닮은 분”이라는 영락교회 이철신 목사의 말이 그의 신앙과 인격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추양의 영적 감화력이 더욱 절실한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글·사진=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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