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대지를 품은 ‘세상의 어머니’ 되다



펄 벅은 한국을 8차례 방문하며 오갈 데 없는 혼혈 아동들을 돌보는 재단과 시설을 세웠다.
1960년대 말, 펄 벅이 ‘소사희망원’ 아이들과 함께 경기도 부천시 펄벅재단 사무실로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부천펄벅기념관 제공



“왕룽은 이따금 허리를 굽히고는 손으로 흙을 긁어모아 쥐었다. 그렇게, 한 줌의 흙을 쥐고 있으면 손가락 사이에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였고, 흙과 방 안에 놓여 있는 좋은 관에 대해 때때로 생각했다. 다정한 흙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그가 흙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펄 벅의 ‘대지’ 중에서)
 
‘흙과 인간의 삶’이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표출한 펄 벅(Pearl S Buck·1892∼1973)의 장편소설 ‘대지’는 땅에 영혼을 바친 농민들의 대서사시이다. 빈농으로 재산을 모아 대지주가 된 주인공 왕룽과 그 일가의 생애를 그린 대지는 1부 ‘대지’, 2부 ‘아들들’, 3부 ‘분열된 일가’로 3부작이다. 1부 ‘대지’는 1931년 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출간 다음 해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1938년엔 3부작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지’의 주인공 왕룽에게 땅은 단지 재산이 아니다. 그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고통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어머니이며, 자신은 물론 자손들의 생명을 이어가게 도와주는 신의 선물이다. 왕룽은 자연과 운명에 맞서 삶을 개척해 대지주가 된다. 세월이 흘러 왕룽이 병석에 누워 자식들이 땅을 팔기 위해 의논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땅에서 나왔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들도 땅만 가지고 있으면 살 수 있다. 아무도 땅을 빼앗아가지는 못한다”고 분노한다.
 
‘한국은 보석 같은 나라’
 
펄 벅이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구한말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있는 갈대’가 그의 또 다른 걸작이라는 사실과 그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회사업 활동을 한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살아있는 갈대’는 1963년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됐다. 펄 벅은 작품에서 “한국은 고상한 국민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이다. 이 나라는 주변의 세 나라 중국, 러시아, 일본에는 여러 세기 동안 잘 알려져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나 서구 사람들에겐 아시아에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작품은 한국의 격동기에 태어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투쟁한 한 가족을 4대에 걸쳐 그리고 있다. 주인공 김일한은 유한양행 창업주 고 유일한 박사가 모델이다. 작품은 구한말에서 해방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피상적인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성과 저항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살아있는 갈대’란 제목은 불의와 폭력 앞에 꿋꿋한 저항 정신을 상징한다. 살아있는 갈대는 살아있는 희망을 의미한다. 인생의 들불이라는 재난을 만나 모두 불타 버려도 흙 속에 박힌 뿌리는 다시 생명을 이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펄 벅은 1960년 이후 69년까지 여덟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살아있는 갈대’를 집필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알아갔고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한국에 깊은 애정을 보였던 펄 벅을 기념하는 경기도 부천시 성주로 ‘부천펄벅기념관’을 지난 9일 찾았다. 이곳은 원래 유한양행의 소사공장이 있던 곳이다. 펄 벅은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에게 부지 3만3058만㎡(1만평)을 기증받아 이곳에 한국전쟁 혼혈아들을 돌보기 위해 소사희망원을 1967년에 세웠다. 그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곳에 2, 3개월씩 머물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아이들을 손수 입히고 먹이고 씻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소사희망원은 76년 문을 닫을 때까지 1500명의 혼혈아동이 머물렀다. 부천시는 2006년 펄 벅을 기리기 위해 소사희망원 자리에 펄벅기념관을 세웠다. 지금 소사희망원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소사희망원 부지 대부분엔 아파트가 들어섰고 펄벅기념관만 그 터를 지키고 있다.


 경기도 부천시 성주로 ‘부천펄벅기념관’(위)과 내부. 
 기념관 내부에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입었던 투피스와 
 ‘살아있는 갈대’를 집필 할 때 사용했던 책상이 보인다.


 
농민들의 대서사시 ‘대지’
 
펄 벅은 중국에서 성장한 미국인이다. ‘푸른 눈의 동양인’으로 불린 펄 벅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태생으로 중국 선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생후 석 달 만에 중국으로 건너가 양쯔강 연안의 전장이라는 소도시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족은 선교사들이 살던 종교인 거주지에서 생활하지 않고 중국인들 속에서 살았다. 펄 벅은 중국인 유모의 손에서 자랐기에 영어보다 중국어를 먼저 배웠고 남빛 중국여자 옷을 입고 중국인 소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이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펄 벅은 18세가 되던 해 미국에 돌아가 버지니아의 린치버그에 있는 랜돌프 메콘여자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어머니의 병 간호를 위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7년 펄 벅은 장로교 전도회에서 파견한 25세의 농업전문가 존 로싱 벅과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이 난징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그도 이듬해부터 난징대학에서 초급영어를 가르쳤고 10여년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장로교의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1930년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장편 처녀작 ‘동풍 서풍’을 출판, 1년 안에 3판까지 찍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아버지의 병구완과 대학 강의까지 하며 장편 ‘대지’를 집필했다.
 
펄 벅은 문학뿐 아니라 사회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세상의 어머니’가 되고자 했다. 미국인과 아시아인 혼혈아들을 입양하는 일에 헌신했고 그 자신도 7명의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1964년 펄벅재단을 설립했으며 67년 수입의 대부분인 700만 달러 넘는 돈을 재단에 희사했다. 그는 1973년 3월 6일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동서양을 배경으로 8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로 ‘살아있는 갈대’ 외에 ‘한국에서 온 두 처녀’ ‘새해’가 있다.
 
살아있는 갈대, 살아있는 희망
 
혼혈아를 위한 재단을 세워 인도주의 작가로 알려진 펄 벅은 작가의 최대 사명은 동서양의 벽을 허물고 인류의 복지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라난 스스로를 ‘정신적 혼혈아’라고 불렀다. 작가의 인도주의 정신은 그의 모든 작품에 흐른다. 그는 에센스란 시에서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든 작품의 에센스는 이 지상엔 사랑이 없으면 공포가 있을 뿐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념관에는 펄 벅이 쓴 소설의 초창기 판본을 비롯해 직접 사용한 타자기, 한국 방문 시 사용한 가방, 소사희망원 아이들로부터 80세 생일 선물로 받은 산수화, 생전에 즐겨 착용하던 진주 머리핀 등 유품 250여점이 전시돼 있다. 펄벅기념관은 부천둘레길 2코스에 들어있어 지역 주민들의 쉼터이자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매년 그림그리기대회 펄벅문학상 등 다양한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지난 한 해 동안 1만5000여명이 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에서 만난 권택명(67·펄벅재단 상임이사) 시인은 “펄 벅은 선교사의 자녀로서 기독교적 환경 속에 성장해 그 작품 밑바탕엔 성경적·기독교적 정서가 흐르고 있다. 특히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약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 박애적 사랑의 실천은 그가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성주산 자락에 있는 펄벅기념관 앞에 서니 대지의 봄기운이 느껴졌다. “대지는 그의 마음의 병을 고쳐 주었다. 태양은 머리 위에 빛나며 그의 괴로움을 잊게 했고, 여름의 더운 바람은 부드럽게 그를 감싸 주었다.”(‘대지’ 중에서) ‘살아있는 갈대는 살아있는 희망’이란 작가의 메시지가 명징하게 살아있는 곳이다.


‘소사희망원’ 아이들과 함께 한 펄 벅 여사.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살아있는 갈대’ 원서(왼쪽)와 번역본.
부천펄벅기념관 제공
 


[펄 벅처럼 생각하기]



 
"가정은 대지이다 나는 거기서 나의 정신적 영양을 섭취하고 있다"
 
"나는 원래 가정적인 성품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나의 시대는 내 재능-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과 더불어 나를 작가로 만들었으며, 나로 하여금 내 가정과 내 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여러 국민들의 삶 속 깊이 살게 하였다."(자전에세이 '나의 몇 세계' 중에서)
 
펄 벅을 작가로 만든 것은 팔 할이 고난이었다. 그는 결혼생활이 원만치 못했고 발달장애를 가진 딸로 인해 인생의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 했다. 그러나 펄 벅은 그로 인해 '영혼의 나이테'를 늘려갔다고 고백했다. 그는 "가정은 대지이다. 나는 거기서 나의 정신적인 영양을 섭취하고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가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 고백하듯 그의 딸 캐럴은 그를 작가로 만든 중요한 동기가 됐다. '자라지 않는 아이'는 발달장애아 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힘든 과정을 담은 에세이다. 지적장애가 부모의 책임으로 비난받던 시기에 펄벅의 고백은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나는 그 누구에게나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습니다."('자라지 않는 아이' 중에서)
 
그는 다시 장애가 있는 자녀를 가진 세상의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탄생에는 삶의 권리가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지적장애아든 신체장애아이든 그 아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다른 사람의 눈총에 신경 쓰지 말고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당당하게 다니십시오. 그 아이는 당신의 삶에 어떤 형태로든 의미를 부여하므로, 그 아이를 위해, 그 아이와 함께 기쁨을 찾는 것이 당신에게도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십시오. 희망처럼 좋은 위안은 없습니다."
 
펄 벅은 1934년 출판사 대표 리처드 월시와 재혼 후 미국에 정착하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그는 기근과 홍수에 시달리는 중국 난민을 위해 일했던 부모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천=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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