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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유럽 8개월 고강도 제재에도 끄떡없는 러시아, 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전쟁과 함께 시작된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는 실효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가 제재를 피해 거래를 우회하고 있다는 근거는 없다”며 제재 효과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서방의 제재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루블화 강세, 세계 5위의 외환보유액, 풍부한 원유와 천연가스 등 제재를 막아낼 요인이 많다는 것이다.

서방은 ‘말려 죽이기’ 시도하지만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는 8차례에 걸쳐 진행되며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씨를 말리기 위해 부과한 ‘금융제재’가 첫손에 꼽힌다. 러시아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거래 자체를 차단해 타격을 주려는 의도다. EU와 미국이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 등 주요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제외한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에너지 분야에 대한 제재도 범위가 넓다. 미국은 러시아의 석유, 천연가스 및 석탄 수입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EU는 지난 5일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가격상한제 적용을 골자로 하는 추가 대러 제재에 합의했다. 러시아산 철강 제품과 석탄, 목재, 시멘트 등의 상품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수입은 전면 금지된 상태다. EU산 첨단반도체, 양자컴퓨터 등의 러시아 수출도 금지됐다.

러시아 주요 인사 등을 대상으로 한 개인 제재도 확대되고 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전 첼시 FC 구단주 등 크렘린궁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올리가르히(신흥재벌)가 주요 대상이다. 푸틴 대통령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장관의 자산은 이미 미국과 EU 영국 캐나다 등에서 동결된 상태다. 푸틴의 측근이자 러시아 철강업체 대표인 알렉세이 모르다쇼프가 소유한 요트는 EU에 압수당해 최근 경매에서 3750만 달러(약 535억원)에 팔렸다.

강한 루블화로 버티는 러시아

이 같은 광범위한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대러시아 제재 효과는 미미했다는 게 외신의 분석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이 인플레이션을 최고 18% 수준에서 방어한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 초기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급락했지만 지금은 전쟁 이전보다 더 높은 가치를 유지하며 ‘루블화 강세’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당시 러시아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과감히 20%까지 올리고 외화 송금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빠르게 취한 덕분이다.

특히 올해 가스 및 석유 가격의 엄청난 상승은 러시아에 막대한 이익을 안기며 서방의 제재를 무디게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7월 기준 러시아 수출량은 소폭 줄었지만 수출금액은 오히려 늘었다고 전했다. 국제금융연구소의 엘리나 리바코바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가 올해 7월까지 석유 및 가스 판매로 970억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이 중 약 740억 달러를 석유로 벌어들였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올해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지난해의 3배 수준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를 우회해 물자 등을 거래할 통로가 많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외 석유 회사와 거래업자들은 러시아산 원유를 구입해 다른 국가의 원유에 섞어서 매매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피한다. 러시아산 원유를 다른 원유와 섞을 때 러시아산 원유를 절반 이하로 맞추면 러시아산이 아니라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튀르키예(터키), 중국, 인도 3개국이 러시아산 원유 구입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내년 상반기 제재 효과 나타난다”

미국 등 서방은 제재의 효과가 내년 상반기에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분위기다. CNN은 지난달 미국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미국 주도의 대러 경제제재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나 이르면 내년 초 효과가 가시화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러시아 경제가 장기간 깊은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러시아 내부 보고서가 유출됐다.

러시아의 경제학자이자 영국 런던의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미하일 마모노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대러시아 제재는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당시의 서방 제재와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디언에 “모든 첨단 기술 수출이 금지됐고, 러시아는 국제 금융 시스템에서 완전히 배제된 상태”라고 말했다. 또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초 러시아 경제가 2022년에 6% 위축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제재의 추가 영향으로 10% 정도 위축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상준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는 “러시아의 생산력을 뒷받침하는 기계와 장치 수입이 제재로 막히면서 병행수입을 통한 우회 수입이 늘어나 러시아 내 상품 등의 비용이 커지고 있다”며 “글로벌 경제와 연관성이 깊은 젊은 세대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제재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이는 양극화로 이어져 사회적 긴장감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재현 기자 j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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