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나님의 일터] “삶이 흔들릴 때마다 날 붙잡아준 건 십일조와 주일성수였죠”

경기떡집 1대 사장인 최길선 장로는 22일 서울 마포구 경기떡집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서울 3대 떡집으로 성장하기까지 고난과 좌절, 신앙 안에서 이를 극복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사진=신석현


마감 2시간 전 텅 비어 있는 경기떡집 판매대 모습. 사진=신석현


‘오병이어 기적’ 때문일까. 서울 3대 떡집이라 불리는 ‘경기떡집’ 1대 사장 타이틀과 최길선 장로(70)의 믿음과 섬김은 안성맞춤으로 느껴졌다.

그의 신앙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간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경기떡집은 마감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지만 판매대 곳곳이 비어 있었다. 웬만한 중소기업 매출을 자랑하는 떡집 사장인데도 최 장로는 자신의 삶이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붙잡아 준 건 십일조와 주일성수라고 고백했다.

고생 끝에 떡집 사장

최 장로는 경북의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7살에 상경해 1969년 종로 낙원상가의 흥인제분소에 취업했다. 13년간 일하며 기술을 익히고 돈도 모았다. 보육원 동생인 김영애 집사와 결혼도 했다. 십일조 생활을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시련은 5명과 동업해 청파동에 제분소를 차리면서 시작됐다. 동업자 간 갈등이 생겼고 독립을 선택했다. 최 장로는 94년 마장동에 풍년방앗간 문을 연 게 본격적인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고 아픈 기억을 꺼냈다. 1년 동안 끊임없이 위기가 찾아왔다.

최 장로는 “작업 중 왼쪽 세 번째 손가락이 잘렸다. 병원 치료로 붙기는 했지만 신경은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믿음이 깊지 않았는데 손가락을 붙잡고 기도했더니 서서히 신경이 살아났다”며 손가락을 움직여 보였다.

빚도 늘었다. 500만원 벌면 100만원 밑졌다. 5만 원하던 아이들 학원마저 끊어야 했다. 그때 떡이 눈에 들어왔다. 흥인제분소 시절 인연을 맺은 유명 떡집을 찾아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1996년 합정동의 떡집을 인수했다. 바로 경기떡집이었다.

지금처럼 기술이 완벽하진 않지만 최고의 재료만 사용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었다. 여기까지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떡 장인의 성공기다.

주일성수 그리고 십일조
최 장로는 하나님이 떡집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켰다고 고백했다. 먼저 주일성수였다. 명절과 행사 많은 주일이 대목인 떡집이라 주일을 지키기 어려웠다.

“95년인가, 설 연휴를 앞둔 주일이었어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가’라며 자책하면서도 몰려드는 손님을 내쫓을 수 없었어요.”

일을 마치니 오후 8시였다. 이 시간 열리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민일보 예배가 떠올랐다. 오토바이 뒤에 아내를 태우고 여의도까지 달렸다.

“더러워진 작업 바지 밑단에 얼음이 매달릴 정도로 한겨울 바람은 매서웠어요. 예배당에 들어서니 몸은 녹고 피로가 몰려와 잠들었어요.”

눈을 뜨니 예배는 끝나 있었다. 최 장로는 “그 예배가 창피했던지 기억 속에서 지웠다”고 했다.

1억원 빚을 내 합정동에 떡집을 차렸을 때도 주일성수는 고민이었다.

“빚을 갚으려면 주일에도 일해야 했어요. 큰아들과 기도원에서 사흘간 기도하며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망할 거라면 하나님 잘 섬기고 망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26년간 4시간 자고 20시간 일하는 삶을 살았다.

최 장로는 “몇 년 전 지역장으로 예배에 대한 성경공부를 준비하다 기도하던 중 바지에 고드름이 맺히며 달려간 예배에서 졸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드린 예배 중 그날 예배가 제일’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들렸다”고 말했다.

십일조도 엄격히 지켰다. 힘들 때는 십일조의 두 배를 냈고 감사헌금과 선교헌금을 더하기도 했다.

믿음의 삶은 네 아들이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아들들은 ‘아버지한테 배운 게 십일조’라며 대를 이어 실천했다. 또 주일성수를 위해 유명 백화점이 떡집 입점을 요청해도 거절했다.

“떡 배달을 다닐 때면 오토바이 위가 기도처였어요. 한번은 오토바이에서 기도하는데 ‘나 같은 놈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사랑하시나’ 싶어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어요.”

실천하는 삶

최 장로는 최근 농어촌선교회를 통해 어려운 교회 상황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마장동 이야기를 꺼냈다.

“건물 2층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사모님이 10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어요. 마치 예수님이 달라는 듯했죠.”

하필 그날은 한 달에 한 번, 국수를 납품하는 식당에서 돈을 받는 날이었다.

“저도 힘든 때였는데 사모님께 헌금이라며 받은 돈을 다 드렸어요. 이때 작은 교회를 섬기도록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신 거죠.”

경기도 남양주의 별내들풀교회도 최 장로의 남다른 도움을 받았다. 이 교회 담임인 박희찬 목사는 최 장로의 큰아들 대로씨가 군에 있을 때 군종이었다. 개척교회임에도 재정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교회 공간은 주말엔 예배당, 주중엔 경기떡집 카페가 됐다.

경기도 부천에 지을 1200여평 공장 부지엔 교회를 세울 땅부터 정했다.

“1080평에 80평이 늘었어요. 가격이 비싸 살 때 망설였는데 하나님은 그 땅을 구별해서 쓰라는 메시지를 주셨어요.”

최 장로는 28년 가까이 어려운 두 가정도 돌보고 있다. 그럼에도 베푸는 삶을 알리는 데는 인색했다. 겸손하게 살라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의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행함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하나님 말씀을 경험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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