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내리는 커피] 권세권, 역세권 그리고 커피



대한제국 시기 한양에는 3000명 내외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중 300명 정도가 서양인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정동에 살았다. 왜 이들이 정동을 택했을까?

첫째는 이곳이 권세권이었기 때문이다. 1883년 미국공사관 개설을 시작으로 서양 제국들의 공관이 이곳에 차례로 세워졌고, 공관 주변에 서양 선교사들이 거처를 마련하고 교회 병원 학교를 세웠다. 서양의 신상을 수입해 판매하는 마트도, 서구식 가구를 파는 가구점도 들어섰다. 신상을 좇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이곳은 자연스럽게 ‘랑데부가’ ‘연애가’로 불렸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번에는 권력의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권력 따라 사람이 움직였다.

둘째는 역세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등장한 첫 역세권이 바로 정동이다. 1899년 4월 초파일,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전찻길이 정동 경성역(현 류관순기념관 부근)에서 홍릉까지 개통됐다. 1900년 7월에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됐는데 출발역 또한 경성역이었다.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출발역인 남대문역이 지금의 염천교 앞에 신설되면서 기존 경성역은 서대문역으로 개칭됐다. 남대문역과 서대문역에 이르는 중간 지대 정동은 역세권이 됐다.

권세와 역세를 함께 누릴 수 있었던 정동에는 사람과 신문물이 모여들었다. 신문물 커피를 파는 상점이 처음 등장한 곳도 정동이었다. 1896년 9월 15일자 독립신문에는 ‘A. Gorschalki, Chong Dong, Seoul’이라는 제목의 광고가 실렸다. 갓 볶은 모카커피는 파운드당 75센트, 자바커피는 70센트에 판매한다는 식료품점 광고였다. 이 상점 주인은 곧 베이커리를 열고, 커피와 함께 미제 밀가루로 만든 최고급 빵을 팔았다. 상점 주인 고샬키는 1884년 1월 제물포로 입국한 이후 무역업과 뽕나무 농장으로 돈을 벌어 1895년 초에 서울로 이주한 독일인이었다. 한국의 커피문화는 이렇게 정동에서 독일식 베이커리 카페로 시작했다. 고샬키는 빌딩을 지어 임대업도 했고, 제물포에서 펜션 사업도 했다. 많은 재산을 남긴 채 1917년 조선에서 사망했고, 상속을 받은 그의 부인 이다(Ida)는 귀국해 정동 소재 독일어학교 교장을 지낸 볼얀(Bolljahn)과 재혼했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커피점 또한 역세권에 등장했다. 독립신문 1899년 8월 31일자에 보면 홍릉 전차역에 윤용주라는 인물이 커피, 차, 코코아 등을 파는 휴게소를 열었다. 역시 베이커리 카페였다. 1909년 11월 다방의 시초인 끽다점이 처음 등장한 곳도 남대문역이었다. 1925년 경성역은 일본인 상권에서 가까운 지금의 서울역 자리로 옮겨갔다. 서울역 앞에 최초의 음악다방 돌체가 생겼고, 카페와 다방이 즐비한 소공동이 새로운 랑데부거리가 됐다. 사람도 커피도 권력 따라 우왕, 역을 따라 좌왕하는 사이에 나라는 망했고 정동의 시대는 저물었다. 권력 따라, 역을 따라 사람과 문물이 움직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고, 여전히 경계할 일이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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