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후 부흥의 역사… 기독교, 위기 속 기회 마주하고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코로나 패러독스’ 어젠다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위기는 기회다. 대재앙은 기독교에 늘 있었던 일”이라면서 “교회가 쇠퇴해가는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재앙을 극복했던 그 힘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강민석 선임기자
 
2010년 3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펴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서울 순화동 사무실에서 기독교를 믿게 된 배경과 지성에서 영성으로 거듭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이어령(오른쪽) 새천년준비위원장이 1999년 12월 22일 ‘새천년맞이 국가지정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바라는 다짐대회에 참석한 모습. 국민일보DB
 
1997년 6월 5일 이어령 이화여대 석학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세종로 문화체육부 청사에서 21세기 문화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비전 2000’ 전광판 점등식이 열리고 있다. 국민일보DB


올 11월 달력을 막 넘기려는 순간, 고대하던 전화가 걸려 왔다. 국민일보 창간 33주년(12월 10일)을 앞두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인터뷰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이 시대 지성인의 상징인 이 전 장관을 만나기는 참 쉽지 않았다. 인터뷰 일정을 여러 번 조율했지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다음에…’라는 세 글자로 수차례 연기되곤 했다. 김명기 목사(국민일보목회자포럼 사무총장)와 함께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을 대신해 그의 지혜를 빌리기 위해 지난달 30일 투병 중인 것을 알면서도 이 전 장관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이 전 장관의 서재는 서울 종로구 평창로 북한산 자락의 영인문학관 내 2층에 있다. 영인(寧仁)문학관은 이 전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 교수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딴 명칭이다. 한옥 대청마루처럼 넓고 아늑한 2층 서재는 도서관 한 채보다 커 보였다. 그의 서재에는 ‘광복 76년, 미래 24년’ 대한민국 100년이 꽂혀 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로 시대를 선도하는 우리나라 대표 지성의 모습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 장관의 비밀스러운 서재의 문을 여는 순간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접목하고 사유하며 사회의 변화와 미래를 읽어내는 통찰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한국인 정체성에 관한 담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무궁무진한 히스토리 등 그의 담론에 대한 기대감은 형언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산업화를 몸으로 체험한 이 전 장관을 통해 인류의 삶과 문화를 해독하고 앞으로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리해 볼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만난 자리는 채 40여분을 넘기지 못했다. 이 전 장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지성과 영성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단독 인터뷰를 하기로 했지만, 힘이 많이 부치는지 더 진행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전화와 이메일로 대신하기로 하고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하고 영인문학관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찡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15일 가슴 죄며 기다렸던 답장이 왔다. 이 전 장관은 수시로 찾아오는 호흡곤란 등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명불허전 최고의 지성과 영성의 진수를 들려줬다. 이 전 장관에게 물은 질문은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임종 전 가톨릭 신부에게 던진 질문을 개신교 개념에 맞게 다시 정리한 것이었다. 이 전 장관은 인간이 짊어진 인생의 3대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들려줬다.

짧은 만남, 긴 여운을 남겼다. 역설(逆說) 또 역설이었다. 죽음이 끔찍한 일상이 된 그는 “인류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경험하게 됐다”면서 “세계대전보다 더 거대한 죽음 앞에 벌거벗은 채로 살아가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상심을 되찾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질문은 의문으로 시작되는데, 단지 물음표에 느낌표가 따르지 않으면 빈 깡통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그 느낌표를 얻기 위해 철학을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스 말로 ‘타우마제인(Thaumazein·놀라움)’이라고 했다. 물음표는 지성이고 느낌표는 감성이요, 영성이다. 이 전 장관은 물음표와 느낌표, 그 문지방 사이를 아직도 헤매고 다닌다고 고백했다. 이 장관의 사유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현장에서 금방 건져 올린 생선처럼 싱싱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학’에서 니은(ㄴ)을 빼면 시학(詩學)이 된다”고 한 말이다. 신의 존재를 언어의 기호로 보여주려고 도전하며 모험하고 있다는 고백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라틴어 3대 경구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 그리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의 지혜를 알기 쉽게 설명했다.

암과의 투병, 죽음과 친해지면서 자연히 운명을 사랑하고 탄생의 신비를 배우며, 생을 담담하고 의연히 살아내고 있는 이 전 장관의 모습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살아있는 성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새로운 탄생의 신비를 발견했다는 그의 고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이 장관과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제일 큰 죄악은 인간의 오만 ‘휴브리스’

-온 지구와 전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종교가 현실적으로 그 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신가요.

“이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 모든 현대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종교적 가치와 구제를 찾게 되었다고 봅니다. 첫째로, 인간의 능력으로 쌓아 올린 문명과 문화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가를 보았습니다. 쓰나미로 한 도시가 사라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기독교에서 제일 큰 죄악이 ‘휴브리스(Hubris)’, 인간의 오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았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생존의 수단 때문에 생명의 귀중함을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각국의 차이를 국내총생산(GDP)의 숫자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이제는 코로나의 발생 수와 사망자 수로 바뀌었습니다.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인간은 죽는 존재이면서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셋째로, 특히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기독교 문명의 본바탕인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시련을 겪고 있어요. 꼭 중세 시대 페스트로 인해 기독교의 기반이 흔들리던 때와 같은 그런 위기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아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문제 제기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코로나 패러독스(Corona Paradox)’라고 부릅니다. 코로나는 예수님과 천사들 뒤에 원처럼 비치는 빛입니다. 왕관이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천사들의 것입니다. 이름부터가 익살맞지 않습니까. 자유의 여신상이 머리에 뭘 쓰고 있습니까. 뾰족뾰족한 것. 그게 코로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좋고 성스럽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죄악의 팬데믹이 되고 가장 기피의 언어가 되었을까요. 이 코로나로 인해 전 인류가 현재 대재앙을 겪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대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인구도 불어나고 그 이전보다 번영이 이루어졌습니다. 페스트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패러독스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런던 인구 3분의 1이 희생당한 1664년의 페스트이고, 엎친 데 덮친 경우로 다음 해 런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그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비롯해 쟁쟁하고 왕성한 지식인의 출현과 산업혁명, 그리고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로 영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어요. 런던만이 아닙니다. 페스트라는 재앙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파리 역시 페스트가 지나간 뒤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발전,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화려한 꽃을 피웁니다. 이것이 바로 팬데믹의 패러독스입니다. 저는 이 패러독스의 마지막이 기독교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불신받고 쇠퇴해가는 기독교에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재앙을 극복했던 그 힘을 되살려내는 희망입니다. 이는 ‘크리스처니티(Christianity)’가 새롭게 해석되고 기독교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기회일지 모릅니다. 흔한 말로 “위기는 기회다.” 기독교에 늘 있는 일 아닙니까. 핍박받았잖아요. 교회는 지금도 핍박받고 있습니다. 마치 코로나를 옮기는 병의 온상처럼 인식되고 있어요. 교회는 늘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병만 옮긴다고 예배도 못 하게 핍박을 받지 않습니까.

-죽음에 직면한 이병철 회장이 가톨릭 신부님께 여쭈었던 24가지 질문을 다시 새롭게 정리, 요약해서 묻겠습니다. 이번에는 신학자도 성직자도 아닌 한국의 대표 지성에 여쭈려 합니다.

“이 큰 질문을 어찌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명약관화라는 말이 있듯이 진실하다면, 그것이 진리라면 짧은 답변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글을 쓰는 자유로운 사람이니 비유, 스토리텔링, 상상력, 추리력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이라고 바꿔보세요. 우리가 부모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믿고 살아왔지 정말로 나를 낳아주셨는지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해 온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런데 부자지간에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미 그건 끝난 이야기예요.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정말 저를 낳으셨는지,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증명해보십시오”라고 한다면 ‘DNA 감정을 해주십시오’라는 말이 되고 지금까지 저를 사랑하신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이미 그 부모 자식 관계는 파탄 난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모 자식 관계가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증명하는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족의 사랑이고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신앙의 세계인 거지요.

-증명할 수 있다면 그들의 요구대로 증명해 보이면 되지 않을까요.

“이미 도마가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내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도 증명해 보이라고 했지요.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증명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신이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증명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을 증명할 수 있겠어요. 예수님은 옆구리의 창 자국과 손의 못 자국으로 도마의 회의에 대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부활을 증명해 보였어요. 증명의 몫은 전지전능한 신보다 지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칸트나 데카르트 등 많은 학자, 수학자, 과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썼어요. 자신이 유발 하라리가 얘기하는 호모 데우스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을 증명하려고 한 회의론자에게 직접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면 됩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자다”(요 20:29)라고요.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모습 똑똑히 드러내

-하나님은 왜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을까요.

“기독교에서는 종교를 ‘릴리전(religion)’이라고 합니다. 끊어진 끈을 다시 잇는다는 뜻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정독하여 자세히 읽는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원죄로 인해 끊어진 관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실낙원이라고 하는 현실상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그 끊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돼야지만 하나님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를 보고 그때 대체 신은 어디 있었냐고 하지만 직접 그 수용소에서 생활한 빅터 프랭클이 쓴 ‘밤과 안개’를 보면 신은 오히려 아우슈비츠 같은 지옥의 극한상황에 똑똑히 나타난다는 겁니다. 극한상황 속에서는 착한 사람이 악인이 되고, 악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지요. 먼 예를 들 필요도 없어요. 요즘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 그대로입니다. 극한상황에 놓였을 때 모든 사람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신도 그 모습을 똑똑히 드러내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극한상황 속에서 끊어진 관계가 릴리전, 다시 이어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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