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2월 6일] 삭개오 영성



찬송 : ‘샤론의 꽃 예수’ 89장(통8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누가복음 19장 3~4절

말씀 : 어린 시절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설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손과 들릴라, 노아의 방주, 모세의 홍해의 기적 그중에서도 가장 생생했던 이야기는 단연코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였습니다.

삭개오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어린 시절 가슴속에 생생하게 다가왔고 지금까지도 잔잔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열정을 다해 말씀을 전해주시던 선생님들의 노력과 애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노력과 애정이 삭개오를 만나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발견됩니다.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 날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여리고는 목적지가 아닌 지나가는 곳이었습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는데 갑자기 여리고에 머물기로 결정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삭개오가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삭개오가 누구이기에 계획마저도 바꿀 정도로 예수님의 마음을 붙들었을까요.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세리 신분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리 크지 않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삭개오는 그보다 유난히 더 작은, 거의 발달장애의 상태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관계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분명히 삭개오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기피했을 것입니다. 대인 기피증이 자연스러운 그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삭개오의 마음을 흔드는 표현할 수 없는 한 가지 열망이 그에게 불어왔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열망은 3절과 4절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보고 싶다.”

보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표현할 길 없는 열망을 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열망은 그를 어디에도 묶어두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비집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설령 자신이 나간다 할지라도 사람들을 마주하기에는 그리고 자신의 키로는 예수님을 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로 달려갑니다. 성경은 “앞서 달려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달려가는 것을 천하게 여겼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양반들의 규칙과도 흡사했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그런 겉치레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면서까지 여리고 삭개오의 집에 머무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오직 예수님을 보고 싶은 순수한 그 마음 그것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삭개오 영성입니다.

기도 : 주님 아무런 조건 없이 예수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삭개오의 마음, 그 영성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혁 목사(변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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