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트루디 (14) 울타리 없는 서양식 집… 부자로 착각 거지·도둑 줄이어

트루디(왼쪽 첫 번째) 사모가 1961년쯤 첫째 아들 김요셉군을 안고 남편 김장환(왼쪽 두 번째) 목사, 지인들과 함께 수원 인계동의 집 문 앞에 앉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 트루디와 빌리라고 적힌 대문 문패도 세워져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 남편은 돈을 아끼기 위해 울타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거지가 찾아올 때도 많았다. 농촌마을에 서양식 집이 떡하니 자리했으니 부잣집인 줄 알고 구걸하러 온 것이다. 어떨 때는 하루에 10명 넘게 온 적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돈보다 쌀을 주면서 손을 붙잡고 기도를 해줬다.

“하나님 귀한 형제가 가난을 벗게 해주시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세요.” 그럴 때면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불쾌하다며 돌아선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호적이었다.

그중에는 나병 환자들도 있었다. 딸 애설이와 단둘이 집에 있으면 가끔 거실에서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곤 했다.

“애설아 무슨 일이야. 어머.”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다급하게 뛰어나온 나는 거실 유리창을 통해 나병 환자가 얼굴을 가깝게 대고 애설이를 보고 있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코와 눈썹이 없어서 보는 어른도 놀라는데 아이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남편이 없을 때 도둑이 들어 집안 물건을 집어 간 적도 많다. 한번은 지인에게 받은 하이파이 음향기기를 잃어버려서 무척 속상했다. 또 다른 도둑은 남편의 가방을 뒤져서 선교비를 훔쳐 갔다. 외국에 나가려고 준비해둔 2000달러를 몽땅 들고 간 것이다. 그 돈은 남편이 외국에 나갈 때면 유학생들에게 100달러씩 주기 위해 선교비로 열심히 모은 돈이었다. 아침에 도둑맞은 사실을 알고 남편과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도둑과 내가 직접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는데 도둑이 시어머니 시계를 들고 황급히 달아났다. 한번은 아이들이 거실에서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났다가 도둑과 마주쳤다.

“쉿 조용히 하쇼. 떠들지만 않는다면 나도 조용히 나갈 거니까. 우리 피차 엄한 꼴 안 당하도록 합시다.”

나는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 역시 겁을 먹었는지 물건만 들고 조용히 대문으로 나갔다. 도둑이 나간 뒤에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다. 이후 남편은 3년 만에 울타리를 만들어줬다.

우리 집은 자잿값만 들여 어설프게 완공한 집이라서 처음부터 말썽이 많았다. 구들장을 제대로 놓지 못해 겨울에는 가족이 연탄가스를 일곱 번이나 마셨다. 기적적인 건 남편이나 아이들 모두 단 한 번도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차고를 개조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학생들과도 함께 지냈는데 그들 또한 연탄가스에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니 하나님이 지켜주셨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거나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즐겁게 생활했던 기억이 난다. 시댁에 있을 때 요리를 배우지 못한 나는 여학생들에게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신 요즘 뭐가 그렇게 신나.”

남편은 음식 만드는 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묻곤 했다. 그러면 나는 혼잣말로 “시댁에서 미처 몰랐던 식도락을 여기서 알게 됐다고요”라고 말하며 웃곤 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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