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영성 작가] 강물이 바다와 하나되듯 온전한 자기 부인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라

게티이미지뱅크












잔느 귀용(1648~1717·아래 사진)은 17세기 프랑스 경건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유럽의 경건주의와 존 웨슬리, 제시 펜 루이스, 앤드루 머리, 허드슨 테일러 등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300여년 지난 지금까지 그의 저서들이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만의 특별한 영적 깊이로, 남들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진리를 밝혀주기 때문이다.

귀용은 가톨릭교회와 왕실의 박해, 비인도적인 감금 등의 가혹한 고난을 견뎠다. 그는 옥중에서도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가 칠흑 같은 어두운 시간을 통해 발견한 영적 보화는 ‘자기 포기’ ‘깊은 기도’ ‘하나님과의 연합’ 등이었다. 자기 포기는 그를 깊은 기도에 이르게 했으며, 깊은 기도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최종 도착지로 인도했다.

국내 소개된 귀용의 저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도’ ‘영혼의 폭포수’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순전한 사랑’ ‘하나님과의 연합’ 등 다수가 있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고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귀용은 수녀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16세 때 22살 연상인 자크 귀용과 결혼했다. 이후 일생은 고난으로 점철됐다. 남편의 병시중과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뎌야 했고, 무서운 전염병으로 두 아들과 딸을 잃었다. 28세에 남편과 사별한 귀용은 선교 사역을 위해 제네바로 이주했다. 그의 독특한 신앙관과 저작들은 주목받았다. 특히 1685년 ‘기도의 방법’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는 프랑스 전역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깨웠으며 유럽 전 대륙에서 그의 책들이 읽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얻어지는 의롭다 함’과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기도한 것’ 등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가톨릭 당국과 루이 14세에 의해 이교도로 정죄당해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다. 8년간의 수감 생활 이후에도 다시 프랑스 중부 블루아 지역에서 긴 유배 생활을 했다. 그가 긴 고난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포기하고 내어 맡김에 있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은 깊어만 갔다.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침묵과 묵상을 통해 주님과 만나는 일을 쉬지 않았다. ‘내면의 골방’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다. “나의 기도의 영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고 더욱 성장해갔습니다.”(‘순전한 사랑’ 중)

17세기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열띤 신학 논쟁의 한복판에서 그가 붙든 주제는 ‘프루이티오 데오’(fruitio Deo ‘하나님을 즐거워함’)이다. 귀용은 인간의 최고 목적이 이생에서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정화의 과정을 통해 지상에서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 주장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강한 형태의 프루이티오 데오를 현세로 가져왔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이미 중세 신비가들이 도입한 바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자기희생 없이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과 자아의 철저한 부정 또는 소멸이 있어야만 하나님 안에서 큰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귀용의 권면을 불편해했다.

전 생애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귀용은 “주님을 깊이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일관되게 말한다. ‘자기 포기’(자기 부인)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요소다. 귀용이 말하는 ‘자기 포기’란 모든 염려를 던져버리는 것이다. 모든 영적 문제마저 옆으로 제쳐 놓는 것이다. 결국 자신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해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완전히 녹아 없어지는 것이 반복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자기 뜻을 하나님의 깊은 뜻에 완전히 던져 넣으므로 영원히 자기 뜻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으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포기란 주님이 임재하는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다. “자기 포기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잊어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순간의 하나님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 중)
 
하나님을 즐거워하라

안락함과 소비지상주의가 특징인 이 시대에 자기를 포기하라는 복음의 변치 않는 촉구는 어쩌면 쉽게 무시될 것 같다. 그러나 귀용은 사도 바울과 더불어 상실(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귀용은 자아를 아낌없이 하나님께 쏟아내면 깊은 영적 양분과 힘을 공급받아 결국 인류의 최고선을 누리게 된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오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여! 그토록 비참했던 영혼이 이런 행복을 찾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인들 할 수 있었을까요. 오 복된 가난, 복된 상실, 복된 무여, 이것들은 다름 아닌 광대하신 하나님을 찾게 해 줍니다.…오 복된 밀알의 죽음이여, 그로 인해 밀알은 백배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 12:24).”(‘순전한 사랑’ 중)

또 귀용은 하나님은 자석같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중심 지향의 법칙’이라고 설명했다. “주님은 당신을 점점 더 주님 자신에게로 자연스럽게 끌어당기십니다. 당신의 영혼은 점차 그것으로 고유한 중심 즉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영혼이 중심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무게라는 힘 외에 그 어떤 다른 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 중)

귀용은 우리가 성령님의 끌어당기는 힘 아래 굴복할 때 하나님과 연합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합을 위한 준비 과정이란 것. “거룩한 연합 이것은 단지 우리의 체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묵상이 거룩한 연합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나 예배, 경건 생활이나 희생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빛을 비추어 주시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연합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있어야 합니다.”(‘하나님과의 연합’ 중)

17세기 그리스도인의 영적 각성을 이끌었던 귀용의 목소리는 저작들을 통해 현재도 살아 있다.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주님을 더 깊이 만날 것’을 요청한다. “주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다만 그분의 뜻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을 비우고 주님만을 의지하십시오.” “고난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시기를 허락하신 이유는 영적인 게으름으로부터 당신을 깨우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깊이 체험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린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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