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두상달 (28) “나 교회 다니기 시작했어” 형수 말에 감격의 눈물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 부부의 세 자녀와 며느리, 사위를 비롯해 손자·손녀 등 3대가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내를 만나기 전 ‘김영숙’이라는 여인과 데이트를 했었다. 그러다 동명이인인 아내를 만나 연애를 했다. 결혼을 약속한 뒤 청첩장이 나왔는데 그걸 보고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지인들이 청첩장 받으면 내가 전에 만나던 ‘김영숙’인줄 알겠네.” 무심결에 한 말이었는데 큰 실수였다. 그날 찍혀서 평생 구박받으며 살고 있다.

1969년 3월 22일 결혼식이 끝나고 호텔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예배 순서를 꺼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고 찬송을 부른 뒤 함께 기도했다. 믿음이 충만해서가 아니었다. 처음 하는 결혼이었고 으레 이렇게 하는 거로 알았다.

어린 시절은 토속신앙을 믿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큰 형님과 형수가 차례와 제사를 열심히 드렸다.

하지만 나로 인해 우리 집안에 복음의 씨앗이 심겼고 점점 복음화돼 갔지만, 형수님은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제사를 지낼 때면 막내라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다 40여년 전 어느 추석 때 계속 끌려다닐 수 없어 형수님이 차린 제사상을 안방으로 옮긴 뒤 거실에서 온 가족이 예배를 드렸다. 형수님은 너무 화가 나 다른 방에서 울고 계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배드렸고 형수님을 위해 기도했다.

몇 달이 지난 연말, 형님 내외 분이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형수가 “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 새벽기도회도 다닌다”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변화한 형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새해 첫날 아침 온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한 집안이 완전 복음화가 이뤄진 감사와 감격의 메시지를 전할 때 끓어 오르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목이 메 찬송가를 부를 수 없었다. 온 가족이 울었다.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단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가족에게 미숙한 사람이었다.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다 큰 자식들에게 여러 번 사과했던 일도 있다. 그래도 새벽마다 곤히 자는 사춘기 아이들을 껴안고 20~30초 정도 기도해 줬다. 기도의 품에서 자란 아이는 결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이런 일화도 있다. 수많은 친구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한번은 우리 부부가 외출했다 돌아오니 막내딸이 “아빠 친구가 왔다 갔어. 보석이랑 귀중품이 어디 있느냐 묻길래 다 알려줬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도둑인 든 것이었다. 아내가 깜짝 놀라자 뭔가 잘못했다는 걸 느낀 아이가 크게 울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는 아이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우리 집에 귀중품이 있었더라면 오히려 아이가 어떤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보석이 없다. 가족과 신앙이라는 보석만 남았을 뿐이다.

약사인 아내는 40세가 넘어 신학을 공부했고 60세가 넘어 가정 회복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창 공부할 때 친구들이 “그 나이가 돼 뭐 하려고 공부하냐”고 핀잔하면 아내는 “남 주려고 그런다”고 답했다. 실제로 환갑 넘어 받은 박사학위를 15년 넘게 사용하고 있다. 늦은 나이는 없다. 나는 곧 ‘바보야. 결론은 후반전이야’라는 제목의 책을 낸다. 경기도 인생도 후반전이 중요하다. 연극도 클라이맥스가 중요한 법이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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