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동부 (3) 칠·용접 등 닥치는 대로 기술 배우며 홀로서기 시작

1989년 즈음 스무 살이던 유동부(맨 오른쪽) 대표가 춘천한마음교회 청년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친구들은 대학 신입생이었지만, 유 대표는 빵집에서 일할 때였다.


1985년 즈음 열여섯의 나이로 서울에 홀로 올라왔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로 모여든 이들이 전봇대마다 부착된 구인광고를 보고 취직하던 일이 자연스러울 때였다. 나도 서울로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삼촌이 살던 구로구 가리봉동에 거처를 잡았다.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며 이따금 인근 구로공단에 나가 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마냥 외삼촌 댁에만 머물 수 없을 것 같아 기숙사를 제공하는 회사 위주로 찾았다. 길을 헤매다 한 전봇대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석유풍로와 연탄보일러 등을 만드는 철공소였다. 회사를 찾아갔다. 당시는 어린 나이의 학생에게도 일단은 한번 일해보라는 분위기였던 터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회사가 마련해준 기숙사에선 20대 중후반 되는 형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 오롯이 홀로서기의 시간이었다. 월급으로 7만원 정도 받았다. 나이가 어린 날 받아주기만 한다면, 기술만 배울 수 있다면야 급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공업사였기에 사장님과 직접 대면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형들과 늘 함께 다녔다. 3년 정도 형들과 함께 지내며 페인트칠부터 용접, 프레스 기계 작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다. 하지만 좋았던 추억은 별로 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어두운 밑바닥 생활이었다. 인격적인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을뿐더러 술과 다툼, 폭력 등이 늘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어른에게서 무언가를 본받을 만한 삶은 아녔다. 형들에게 석유풍로를 다듬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억부터 얼굴에 묻은 페인트 자국을 지우려고 ‘신나(시너)’라 불리는 페인트 도료 희석제로 세수를 하다시피 한 경우도 많았다. 한마디로 석유로 세수를 한 것과 다름없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었던 기억들이다.

작은 프레스 기계를 다루다가 실수로 철판에 손등을 찢기는 사고가 난 적도 있다. 4~5바늘을 꿰맸는데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같이 일하던 형 중엔 손가락이 잘려서 병원에 실려 가는 경우도 많았던 터라 이 정도 사고는 아무것도 아녔다.

한 번은 같은 기숙사에 사는 형이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옆에 있던 난 당황한 나머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그 손가락을 공장 벽 아래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병원에 가져가면 접합수술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 덕에 난 그 형의 병시중을 다 들었던 기억도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명절 때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엘 이따금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명절 전 공장 인근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명절을 앞두고 목욕탕을 찾은 이들로 금세 목욕탕 물이 시커메지기 일쑤였다. 목욕한 뒤 서울역에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나서야 겨우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도 어머니대로 생존을 위해 정신없이 사시느라 경황이 없으셨지만, 그래도 항상 우리 삼 형제를 걱정하시며 최대한 뒷바라지하시려 헌신하신 점은 지금도 감사드린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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