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26) 정년으로 은퇴… 케냐 장로교신학교서 인생 2막 열어

이장식 교수가 1986년 한신대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마지막 말씀을 전하고 있다.


1986년 7월 내 은퇴 시기가 다가왔다. 난 한신대로부터 명예 교수의 명칭을 얻었다. 50년 4월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임강사로 봉직한 후 지금까지 36년간 교편생활을 했다. 그중 대구 계명대에서의 재직 4년 6개월을 빼면 32년간 한신대 교수로 재직한 셈이다.

한신대 전체 교수들은 돈을 모아서 한신대학 이름과 마크를 넣은 굵직한 금반지를 선물로 내게 줬다. 난 이 반지를 항시 끼고 다니면서 교수들의 호의를 늘 되새겼다. 전국신학대학협의회에서는 내 30년 신학교육의 공을 치하한다는 의미로 감사패를 줬다.

정년 은퇴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홀가분함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직 더 가르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아이들도 장성해 출가하면서 살던 집이 텅 빈 집 같이 됐다. 나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살던 집을 팔고 안양에 위치한 좀 더 작은 규모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를 사고 남은 돈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기증하고 ‘혜암장학금’이라고 이름 붙였다. 중학교 때부터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나였다. 언젠가는 적은 돈이나마 갚아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가 계속 대신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므로 당장 생활에 큰 곤란은 없었다. 나도 몇 군데 대학에 강사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출강하러 나간 대학들은 안양에서 다 멀었다.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도 멀었지만, 냉천동의 감리교신학대학과 광나루의 장로회신학대학도 가려면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이렇게 가도 반정부 학생 시위로 강의실이 비어 있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난 출강 의욕을 잃었고, 인력이 부족한 외국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마침 케냐 세인트 폴 신학대에 있던 유부웅 목사로부터 케냐 장로교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지 않겠냐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유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내는 대신대 정년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사임하고 나와 함께 케냐로 가기로 결정했다. 내 나이 70, 아내 나이 60때였다.

나는 후원 단체 없이 케냐로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몇몇 목사님께서 후원교회를 찾아서 매월 선교비를 보내주시기로 했다. 이중표 목사님이 회장이 되고 조원길 목사가 총무가 돼서 후원회를 이끌어가기로 했다.

외국 선교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을 때 김재준 목사님이 별세하기 2년 전 내게 친필 휘호를 주신 적이 있다. 난 이것을 족자로 만들어서 방안 벽에 걸어뒀다. 그 글은 한문으로 ‘鵬飛雲外, 渺茫無際(붕비운외, 묘망무제)’라고 쓰여 있었다. ‘큰 새가 구름 밖으로 멀리 끝 간 데 없이 날아가서 묘연해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이었다. 훗날 이 글을 다시 보니 김 목사님이 내 아프리카 선교여행을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내는 90년 11월 27일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케냐로 향했다. 중간에 인도 뭄바이 공항에서 8시간 기다린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30간 넘게 걸려 케냐에 도착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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