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22) 한신대 재직 중 안식년 맞아 예일대 연구교수로 유학

이장식 교수의 딸 현이 1969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버지께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이때만 해도 현은 자신이 그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아내는 결혼 후 5~6년간을 가사에만 매달리며 어린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크자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아내는 한신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기로 했다. 학교와 집이 한 캠퍼스에 있으니 그만큼 공부하는 데 편하긴 했지만 역시 가정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무렵 나는 한신대 10년 근속 후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이했다. 1968년 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학기금위원회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 예일대 신학대학의 연구교수로 가게 됐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아시아 고대 교회역사를 연구하던 내게 필요한 도서가 신학대학 도서관과 예일대 중앙도서관에 많았다. 여기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후에 나는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를 출판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아내의 석사 졸업 소식을 들었다. 나는 아내의 석사 졸업을 축하하며 브로치 하나를 선물로 사서 보냈다. 아내는 그것이 내게 받은 첫 선물이라며 오늘날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예일대에서의 한해는 정말 잠깐이었다. 아쉽지만 귀국길에 오르려는데 아내가 그런 나를 말렸다. 이왕 간 거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난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박사 학위 유무가 교수하는 데 있어서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런 내 생각이 모자란 것임을 당시엔 몰랐다. 근래엔 박사 학위 없이는 신학대학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됐으니 사정이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

아내의 말은 고마웠지만 내가 공부하는 동안 가족의 생활이 걱정됐다. 학비도 문제였다. 50이 육박한 나이에 힘든 공부를 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아내의 계속된 설득에 마지못해 우선 WCC 신학기금 위원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되돌아온 답은 내가 공부하는 동안 장학금을 주겠다는 승낙의 메시지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미국 아이오와주 두뷰크에 있는 아퀴나스 신학교에 입학했다.

계성중학교 때부터 받기 시작한 장학금을 캐나다 퀸즈신학대, 뉴욕의 유니언신학교, 예일대에서도 받았다. 여기에 박사학위를 위한 장학금도 받게 됐으니 참으로 예수님과 그의 교회 덕택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놀라운 일은 여기서 다가 아니었다. 가족 생계를 위해 입학 전 3개월 동안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장로교 노회의 여름 캠프에서 잡일을 담당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몇몇 목사님들로부터 가족의 편도 여비를 후원받게 됐다.

사실 나는 가족 일부를 미국으로 데려올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아내 역시 그걸 바라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분들의 도움으로 69년 11월 초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서울에는 어머니와 두 아들, 조카가 남았다. 이들 생활은 내 퇴직금 분할 선불금으로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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