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21)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설립… 교파 간 교류의 물꼬 터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사택 앞에서 찍은 이장식 교수 가족사진.


1964년 우리 가족은 학교 정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 사택 2층집으로 이사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진, 현, 영이가 태어났다. 앞서 태어났던 정이와 철이까지 하면 2남3녀 대가족이 됐다. 한신대 캠퍼스는 공부하기 좋은 곳이었고, 교수 자녀들에게는 꽃동산이었다.

초등학교에 아직 다니지 않던 교수 자녀들이 많았는데 저녁마다 TV를 보려고 우리 집 마루에 모여 앉았다. 이 TV는 손아래 동서 되는 김운용(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씨가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대사관 한국 참사로 부임해가면서 주고 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캠퍼스에서는 우리 집이 제일 먼저 TV를 갖게 됐다.

이즈음 한국에선 신학 교육 수준 향상의 필요성을 깨달은 교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교단 신학교들 역시 앞다퉈 대학으로 승격해갔다. 그러나 아직 자격을 갖춘 교수가 부족했고, 또 신학 도서도 빈곤한 상태였다. 때문에 신학대학 학장들과 교수들이 신학대학 간 협력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고, 신학대학들의 협의체 조직을 구상하게 됐다. 한국 교파들 사이에선 친교와 교류가 잘되지 않던 때로, 신학교 교수들이 솔선해서 본을 보인 셈이었다.

당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장인 김정준 박사와 내가 그 조직의 헌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65년 4월 온양관광호텔에서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 창립총회를 열었다. 김 박사가 초대 회장, 내가 초대 총무, 정진경 목사가 서기, 그리고 박창환 목사가 회계로 선출됐다.

한편 나는 교회사 교수로서 과거 교회사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살아 움직이는 교회를 가르쳐줄 책임을 느꼈다. 마침 한국교회협의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저술해달라는 청을 받고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자그마한 책을 발행하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68년 ‘현대 교회학’이란 책을 썼다.

이 무렵 한신대 교수와 학생들은 현대신학 사상이 편중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교단 신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의 칼뱅 신학이 등한시됐다. 한신대에선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같은 고전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었고,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도 중요시하지 않았다. 반면 한국 보수계 장로교 신학교들은 칼뱅 신학을 표방하고 가르치는 데 주력하면서 한신대와 기장 교단은 칼뱅주의가 아니라고까지 비평하고 있었다.

신학적 대화를 강조하는 한신대와 기장 교단이 자기 입장도 모르고서 타신학과 타교단과 대화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이러한 문제를 고려해 교수회에 제안해 교수들이 각각 자기 분야에서 칼뱅 신학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논문들을 써서 책으로 내게 했다. 이것이 교수단 공저로 나온 ‘칼빈 신학의 현대적 이해’였다.

나는 한신대에 재직하면서 교무과장으로서 학생들의 생활과 행위가 목사 후보생답게 되도록 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것을 경건 훈련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차원 높은 말, 또는 통속적인 말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칫 그런 말은 형식적인 외모의 경건을 조장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학교의 정한 규정과 생활에 자연스럽게 따라가도록 지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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