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20) 상처 후 평생의 조력자 된 지금의 아내 만나 재혼

이장식 교수와 박동근 사모의 1960년 3월 7일 결혼식 당일 사진.


채봉씨와의 사별 후 어머니와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첫째와 미숙아로 태어난 둘째를 돌봤다. 1년이 지나자 여러 분이 재혼을 권했다. 난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 재혼을 하는 게 좋다는 여럿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이 둘 가진 홀아비가 재혼하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원장로교회 이주원 목사님의 소개로 그 교회 중등부 교사였던 박동근씨와 만나게 됐다. 동근씨는 재원이었다. 당시 수원 농업진흥청 청소년 지도과에 재직하면서 4H운동(농업구조와 농촌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시작된 운동)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동근씨의 삶도 역경이 참 많았다. 그가 부산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한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때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해 인민군 병원에 끌려가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끌려가서 철원을 거쳐 평양을 지나 신의주 가까이에 있는 수안까지 갔었다고 했다.

동근씨는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이 심했던 11월 어느 날 혼란 중에 무리에서 빠져나와 매서운 추위 속을 뚫고 걸어서 남하했다고 한다. 황해도 흥수원에서 한 교회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들어가 그 교회 전도사 댁에서 1주일 정도 머물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곤 서울 육군병원으로 향하는 트럭 사과상자 틈에 몸을 숨겨 그야말로 사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동근씨는 그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해 주신 것을 확신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동근씨는 연세대 신학과에 복교했다. 그리고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미국 유학을 위해 준비도 마쳤으나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한국에 남았다고 했다.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자 동근씨는 큰 아이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동근씨는 첫째를 보고 아주 귀엽다고 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서로의 마음은 확인했지만 동근씨 부모님의 승낙을 받는 일이 걱정스러웠다. 누구보다도 동근씨 아버님이 반대를 많이 한다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그러나 나 역시 물러설 곳이 없었다. 동근씨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서 그의 부모님을 뵀다. 아버님은 엄격한 분 같았으나, 말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몇 가지 질문이 오갔고 이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서 허락을 받아냈다.

우리는 1960년 3월 7일 부산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재혼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물건도 없었고 또 가진 돈도 없었다. 다만 결혼반지만을 건넬 수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운영을 잘 해나갔다. 집 곁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동산을 바비큐 하기 적당한 곳이라며 손질하기도 했다. 나는 바비큐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올해로 아내와 결혼한 지 61년이 됐다. 아내는 내 평생의 조력자이자 격려자였다. 교수 생활을 할 때도, 일흔 넘은 나이에 케냐로 선교사로 나가자 할 때도 아내는 늘 걱정보다 응원을 했다. 이는 아흔이 넘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심한 성격 탓에 많은 표현은 못했지만,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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