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9) 전도관 신앙에 빠진 아내와 장모, 아이 아픈데 기도만

전도관 앞에 늘어선 생수통들. 전도관 신도들은 박태선씨가 축복한 이 물을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다. 현대종교 제공


아내는 박태선씨의 말만 믿고 나를 속히 귀국시켜 같이 신앙촌에 들어가고자 했다. 여의도 미군 비행장에 마중 나온 아내 얼굴은 무척 수척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따라 마포 한 언덕 위의 천막집으로 갔다. 그곳엔 여섯 살 정이가 독감으로 열이 심한 채 누워 있었다.

아내는 이 작은 천막 단칸방에서 모친과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 ‘마포 오만 제단’이라 이름 붙인 전도관 건축 공사장에 매일 나가서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열이 높은 아이에게 약을 사 먹이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도관의 신앙이었다. 나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화를 억누르면서 약을 사서 먹여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있을 곳이 없어 2~3일을 천막집에서 머물렀다. 그동안 이들의 저녁집회에 한 번 나가 봤다. 신도들은 마치 벌겋게 달아오른 대장간의 쇠붙이 같았다. 박씨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아멘’으로 받아들였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한국신학대학 재정을 맡아보던 조선출 목사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돈암동 아리랑 고개에 셋방을 얻어 천막집에서 나왔다.

장모님은 전도관 운동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나오면 박씨와 협력해 일할 수 있도록 특청도 해뒀다. 장모님은 계속해서 날을 잡아놨으니 내게 박씨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박씨 만나기가 대통령 만나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결국 나는 장모님 청을 못 이기고 원효로에 있는 그의 사택으로 갔다. 마당에 들어서니 부녀들 수십 명이 물병을 들고 와서 박씨가 축복한 ‘생수’를 얻으려고 야단법석이었다. 이들은 이를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다.

나는 박씨와 그의 측근들이 기다리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검은 머리는 포마드 머릿기름을 발라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자기의 부흥운동 성과에 대해 한참 설명하더니 사진 몇 장을 보여줬다. 설교할 때 하늘에서 내린 성령의 불을 찍은 것이라 했다.

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가다가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난 그의 말을 끊고 충고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은 “자기를 그리스도처럼 치부하지 말고 재림 예언도 하지 말라”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전도관에 나가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동안 전도관 신도들이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내는 전도관에 발을 끊었다. 그러나 장모님은 소사 신앙촌에 입주해 돌아가실 때까지 그곳에 계셨다.

1958년 3월 동자동에 있던 한국신학대학이 수유리로 옮겨왔다. 새 교정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생각에 신이 났다. 학교가 수유리로 온 지 1년 후 아내가 둘째를 가졌고, 우린 둘째를 기다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부인병으로 수술을 받았던 적이 있던 아내는 부득이 제왕절개로 둘째를 낳았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아내는 수술 직후 숨지고 말았다. 그동안 암담하고 고생스러운 세월을 살다가 이렇게 떠난 아내가 너무도 가련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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