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8) 휴전으로 서울 복귀… 학급 담임 맡다 캐나다로 유학

캐나다 퀸즈신학대 유학 시절 동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멈추게 됐다. 1953년 8월 신학교가 부산에서 서울로 복귀했다. 나 역시 함께 올라와 개강 준비를 했다. 신학교는 그 이듬해 4월 신입생 30여명을 모집했다. 나는 그들의 학급 담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 신입생과 사귈 시간적 여유도 없이 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내가 간 곳은 캐나다 옛 수도 킹스턴에 있는 퀸즈신학대였다. 이 학교 학생회가 내 학비를 부담했는데, 내가 이렇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당시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대에서 유학하던 김정준 목사님의 도움이 컸다. 아내와 세 살 된 아이 정이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캐나다 토론토역에 닿았을 때 캐나다연합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갈라가 목사와 한국에서 선교했던 스코트(서고도) 박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을 만났다. 김 목사님은 송창근 박사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로 송 박사님의 순교와 그의 생애를 다룬 책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저자기도 했다. 김 목사님은 나를 나이아가라 폭포로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 줬다. 가는 길에 코카콜라를 한 병 사줘서 마셨는데 코와 목을 콕 쏴서 첫 모금을 겨우 마셨다. 멋모르고 마셨다가 혼이 났다.

토론토에서 약 한 주간을 지내고 나는 킹스턴으로 왔다. 퀸즈신학대 학생 수는 불과 40~50명 정도였다. 나는 퀸즈신학대에선 물론이고 킹스턴에서도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렇게 퀸즈신학대에서 기초 신학의 모든 과목을 배우게 됐다. 한국에서 신학을 어느 정도 배우고 왔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건 기초가 약한 교육이었다. 처음엔 영어 실력이 모자라서 강의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점차 따라갈 수 있게 됐다.

56년 4월 나는 동급생 8명과 함께 퀸즈신학대를 졸업했다. 이곳에서의 경험과 교육은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됐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기엔 신학교수로서 자격이 모자랄 것 같았다.

나는 뉴욕에 있는 유니언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이 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로서 학력이 가장 높았다.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교수들도 많았다. 당시 내 상황으론 도저히 입학이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1년간 석사과정을 할 수 있었다.

학문의 욕심은 끝이 없다. 미국에서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하버드대학 신학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공부를 더 할 순 없었다. 속히 귀국하라는 아내의 간곡한 권고 때문에 적극적으로 진학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3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당시 한국은 박태선씨의 신앙촌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한국 교계 많은 목사, 장로, 평신도가 현혹될 때였다. 그는 소사에 신앙촌을 만들고 예수의 재림이 그곳에 불원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신앙촌에 입주하는 신도들이 선착순으로 14만4000명이 찰 때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많은 이가 신앙촌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산을 처분했다. 부부나 가족을 버려두고 들어간 이도 많았다. 아내와 장모님도 여기 빠져있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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