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6)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기 직전 가까스로 풀려나

서울 용산구 서울성남교회(옛 성바울전도교회)에 세워진 만우 송창근 목사 추모비. 성바울전도교회를 세운 송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서울성남교회 제공


그날 해 질 무렵 우리는 팔이 묶인 채 인민군에 이끌려 산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서대문형무소 옆을 지나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한 2층 건물 지하실이었다. 인민군 무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릴 구둣발로 차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보다 먼저 산에서 잡혀온 청년이 있었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을 맞은 우리는 어디론가 다시 끌려갔다. 거기엔 점잖은 남자들 수십 명이 갇혀 있었다. 잡혀온 지 한 주 된 사람도 있었고, 한 달 된 사람도 있었다. 그 이상 여기에 갇혀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동장이나 반장, 아니면 동네에서 명망 있는 신사들이었다.

이들 말에 따르면 이곳에서의 성분조사 결과에 따라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거나, 풀려나거나 한다고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가면 죽임을 당하거나 납북된다고도 했다. 이때가 9월 초·중순쯤이었는데, 9·28 서울수복 직전이라 인민군이 한창 밀릴 때였다. 우릴 붙잡아 온 이들 역시 서울 퇴각의 마지막 작업을 서둘러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중간 형무소에 갇혀서 엿새 동안 끼니마다 보리 주먹밥 한 덩어리와 반찬으로 소금을 받아먹었다. 아무것도 없이 산에 은신해 있을 때가 더 잘 먹은 셈이었다. 나는 꼭 한밤중인 새벽 1시경에 불려나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약 1시간 동안 온갖 질문을 해댔다. 이렇게 3~4일을 계속했다.

심신이 지쳐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때 날 심문했던 이가 불러냈다. “단순히 인민군에 협력하기 싫어서 산에 숨어 있었던 것이니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가서 잘 협력하라고 했다. 우리 일행 4명 모두 풀려났다. 어쨌든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풀려난 기쁨도 잠시 우린 청천벽력 같은 소식 앞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두 자매와 함께 신학교로 돌아와 송창근 박사님을 찾았는데, 이북으로 납치됐단 얘길 들었다. 송 박사님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동안 송 박사님이 혹시나 도피할까 봐 사택을 주야로 감시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송 박사님이 납치되기 전에 신학교 근처에 있는 도동 파출소를 점령하고 있던 정치보위국원들이 김재준 목사님과 송 박사님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다.

이때 김 목사님은 무사히 풀려나왔지만, 송 박사님은 그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인민군이 송 박사님을 심문실 밖으로 밀어붙이면서 쫓아냈을 때 그가 입은 저고리 옷고름이 떨어지고 앞가슴이 찢어져 있는 것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 목사님이 봤다고 했다. 심문자들은 송 박사님을 종교광이라고 했다고 한다.

송 박사님을 잃은 신학교는 텅 빈 공간이 됐다. 김 목사님은 경기도 어느 시골로 피신 가셨고, 신학교 내에는 몇몇 교수들만이 사택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돈 한 푼 없고 우거할 집도 없어서 신학교 기숙사 방을 하나 얻어 머물렀다. 그러나 서울에서 살아갈 일이 막연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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