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5) 총성 들려 나가보니 “반동분자 쏴 죽여야…” 위협

완장을 찬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민들이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검정 그 좁은 계곡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서울 수복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갖고 온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시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은 삼각산 산록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피란생활을 계속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인민군이 전투에 동원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을 보는 대로 잡아가던 때였다.

나도 삼각산 기도원 자리에서 많은 사람과 며칠을 지냈다. 인민군이 턱밑까지 보이자 나는 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두 자매와 함께 삼각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피신할 곳을 찾았다. 마침 창의문 밖 감리교회에 다니던 한 청년이 우리와 합류해서 적합한 곳을 찾아냈다. 커다란 바위가 지붕처럼 덮인 곳이었다.

이 산중에서 우리가 매일 하던 일은 언제 유엔군 비행기가 서울 상공에 나타날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토리 열매를 줍거나 산도라지를 바위틈에서 캐기도 했다. 가져온 약간의 식량이 떨어져 가면 두 자매가 하산해서 식량을 조금씩 얻어오곤 했다. 남자는 붙들릴 염려가 있어서 내려갈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자매들의 수고로 연명해갔다.

자매들은 하산하면 조선신학대학으로 가서 송창근 박사님과 김재준 목사님을 뵙고 오곤 했다. 이들이 8월 말 무렵 송 박사님을 찾았을 때 송 박사님은 “날씨도 점점 추워져 그 산꼭대기에서 더 배겨내기 어려울 테니 하산하는 게 좋겠다”는 말과 함께 내 신분증명서를 자필로 써서 보내주셨다. ‘조선신학대학 전임 강사 이장식’이라고 적힌 자그마한 종이였다. 나는 이 신분증명서를 갖고 하산하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흘러 9월 첫 주일 오후가 됐다. 그날도 어김없이 은신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총성이 들렸다. 조금 있으니 바위 밖에서 손들고 나오라는 고함이 들렸다. 영문을 모르고 나와 보니 4~5명의 청년이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내게 총을 들이대면서 “네놈 같은 반동분자는 쏴 죽여야 한다”고 위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얼른 그 신분증명서를 꺼내 보여줬다. 그러나 그 청년은 보지도 않고 빼앗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때 그들에게 끌려온 한 청년이 두 손이 묶인 채 숲속으로 뛰어들더니 산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그를 붙들어온 사람이 그곳을 향해 권총을 쏴 댔다. 총성이 어찌나 컸던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상황에 적응되자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약 한 주 전에 우리가 있는 바위 집으로 찾아와 자기도 피란민이라며 동정을 구한 청년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3~4일 정도 지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민군이 보낸 정탐꾼이었다. 삼각산에 대한민국 국군 패잔병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피란민으로 가장해 살피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인민군 동료들에게 길을 안내해 우리를 잡은 것이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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