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박사로부터 배운 사랑, 선교사에게 흘려보내다

이영희 권사가 지난 19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스승 장기려 박사, 남편 신세훈 장로와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신앙과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예장고신 총회회관에서 열린 기부금 전달식에서 이 권사가 하이패밀리 송길원 대표와 함께 이행 확약서를 들고 포즈를 취한 모습. 강민석 선임기자


이영희(76) 권사의 집 안 곳곳에는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 ‘작은 예수’로 불린 장기려(1911~1995) 박사의 흔적이 보였다. 빛바랜 사진 속 옛 모습에서, 화선지에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직접 적은 ‘성산삼훈(聖山三訓)’ 붓글씨에서 제자를 향한 장 박사의 사랑이 느껴졌다. 장 박사는 1968년 설립한 부산 고신대 간호대학의 전신인 ‘복음병원 부속 간호학교’의 1기 입학생이자 졸업생인 이 권사를 아꼈다.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지난 19일 만난 이 권사는 “장 박사님이 북한에 두고 온 딸의 이름과 같아서 더 이쁨을 받았던 것 같다”면서 “평생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예수의 사랑과 인술의 복음을 펼치신 박사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큰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이 권사는 45년 경남 진주에서 3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받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퀴리 부인처럼 멋진 여성이 되고 싶은 꿈 많은 소녀였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진주여중에서 영어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뒤엔 외교관이 돼 전 세계를 누비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여고 졸업 후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이 무렵 장 박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기독 간호사 양성’을 목적으로 복음병원 부속 간호학교를 설립했다. 장 박사는 부산 산정현교회를 섬겼는데 이 권사의 외가도 같은 교회를 다녔다. 교회에 갈 때면 장 박사를 장로님이라 부르며 따랐던 이 권사는 간호학교의 1기 입학생이 됐다.

학생들은 사랑 많고 인자했던 장 박사를 할아버지라 불렀다. 일과가 끝나면 병원 옥상에 있는 장 박사 사택에 올라가 함께 찬양을 불렀다. 장 박사는 제자가 시집을 가거나 그 자녀가 첫돌을 맞으면 음식을 직접 장만해 찾아와서 축하해주곤 했다.

이 권사는 “전문 교육을 받은 간호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대였다.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처럼, 장 박사님처럼 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며 “박사님은 세계적 석학들이 병원을 방문하면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주일 아침이면 박사님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고 말했다.

71년 간호학교 졸업 후에는 장 박사의 권유로 임용시험을 거쳐 고등학교 교련교사가 됐다. 고신대 간호대학 시간강사로도 일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장 박사는 병상에 누워서도 이 권사를 기다리며 딸처럼 반겼다. 장 박사가 강조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30년간 교편을 잡은 그는 동생들을 시집·장가 보낸 뒤 2001년 은퇴했다. 그해 신세훈(서울 영동교회) 장로를 만나 결혼했다.

신 장로는 동국대 졸업 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밑에서 17년간 경리과장으로 일하며 사업을 배웠다. 퇴사한 뒤 사업을 시작한 그는 동서유통 사장과 영동기업 회장을 역임했다. 영동교회 재정집사이던 78년 예배당을 지을 수 있도록 대지를 헌납했다. 서울 서초구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회관도 신 장로가 기증한 땅 위에 세워졌다. 2010년 주님 품에 안기기까지 그는 교회와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섬겼다.

이 권사는 “남편으로도, 신앙인으로도 훌륭한 분이었다. 사업가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했고, 하나님께 받은 것을 정직하게 돌려드릴 줄 아는 분이었다”고 전했다.

이 권사는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지난 17일 “선교사들을 위해 써 달라”며 서울 서초구의 아파트를 하이패밀리(공동대표 송길원 김향숙)에 기증했다. 시세로 17억원 정도다. 하이패밀리는 오는 4월 경기도 양평에서 기공식을 갖고 선교사들을 위한 ‘잠자는 마을’ 건립에 나선다. 홍익대 유현준 교수가 설계한 ‘잠자는 마을’은 강당 식당 카페 주차장을 갖춘 50여개의 객실로 꾸며진다.

이 권사는 “훌륭한 스승과 남편을 만나 복된 삶을 누렸다. 내 삶을 인도해오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면서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 기도해 달라”고 말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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