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의 문학스케치] 모호함과 막연함






글을 쓰면서 겪는 어려움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해서 하나의 문제를 해결했다 싶으면 곧바로 다른 난제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산 넘어 산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최선을 다해 쓰다 보면 어떻게든 끝에 이르게 된다. 험난한 여정을 거쳐 결말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감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 부분만 마무리 지으면 그럭저럭 무사히 마치겠구나 싶다가도 그동안의 여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생각 탓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한편의 글이 끝나는 순간은 모든 퍼즐이 완성되는 순간과 비슷해서 글에 담긴 가능성의 정체가 확정된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공들여 써 온 글이 뻔한 이야기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중의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갈무리한 글이어서 이쪽을 가리키는 것 같다가도 저쪽을 가리키는 것 같아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여기에 담긴 진심이 무엇인지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든 흔히 우리가 열린 결말이라 부르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마무리하려 애쓴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의적이고 다층적이어서 분명하고 단일한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 이야기를 가리켜 모호함을 획득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모호함을 획득했다고 여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글을 막연한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호함과 막연함은 비슷해 보이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가 헨리 제임스의 소설 <나사의 회전>이다. 이 소설은 액자 형태로 어느 날 밤 난롯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느 저택에 어린 남매를 돌보기 위해 가정교사가 입주한다. 가정교사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어서 남매의 교육과 성장에 정성을 다하지만 그처럼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이 소설을 다 읽으면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망상증을 지닌 가정교사의 집착이 모든 일을 망치게 했다고 볼 수도 있고 가정교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실제로는 유령이 남매를 홀린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웬만한 소설에서도 가능한 모호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어느 한 편을 선택해서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본다면 뭔가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가정교사가 정신병을 지닌 사람이라는 입장을 선택하고 다시 읽어보면 기이하게도 모든 사건이 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선택하고 읽어보아도 마찬가지다. 결국 소설은 두 가지 해석이 전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 해석들은 자기만의 근거를 분명하게 지니고 있어서 다른 해석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독자는 사태를 그르치게 된 이유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모호함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할 수 있다. 모호함은 분명한 게 하나도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막연함과는 다르다. 모든 게 불분명해서 막연한 상태는 겉보기에는 열린 결말처럼 느껴질지라도 사실은 닫혀있는 셈이다. 모호하다는 건 분명한 게 두 개 이상이어서 그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 확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나사의 회전>의 소설적 진실은 이처럼 어느 한쪽에만 절대적으로 결부되어 있지는 않다. 어쩌면 소설의 제목 역시 나사가 어느 쪽으로 회전하느냐에 따라 깊숙이 박힐 수도 있고 박힌 곳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는 것처럼 삶의 진실도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게 아님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삶의 진실이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연루된 상태, 더 나아가서는 두 가지만이 아니라 셋, 넷, 다섯… 아니 무한해질 수 있다면 한 편의 소설이 우리 삶의 이중적이고 다층적인 면모를 오롯이 담아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다. 소설이 소중한 이유도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오직 진실의 편을 고수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글을 쓰는 사람은 결말을 막연하게 처리하면 독자가 알아서 다양한 의미를 읽어내 주리라 방심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의미는 막연한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자. 이 소설은 처음에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두 가지가 분명해지자 이런 것도 가능해진다. 가정교사도 멀쩡하고 유령도 없는 이야기, 가정교사도 미쳤는데 유령까지 출몰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휩쓸려 들어간 이야기….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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