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 생명력’ 부동의 No. 1… 늘 최상의 연기 보여준 얼굴







일찍이 어느 지면에선가 선정했던 한국영화 100년사의 여자 배우 10인은 황정순 최은희 김지미 윤정희 문희 장미희 강수연 전도연 전지현 손예진이었다. 김혜수는 없었다. 왜 김혜수가 아니고 전지현이요, 손예진이었을까? 연기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연기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김혜수는 두 디바를 압도한다. 전도연 문소리와 더불어 두 후배의 역할 모델로도 손색없다.

그녀에겐 그러나 결정적인 그 무엇이 결여돼 있다. 연기력에서 김혜수는 으레, 3년 연하인 전도연의 ‘다음’으로 간주된다. 2019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도 2017년 전도연, 2018년 정우성에 이어 ‘세 번째’ 배우 특별전 주인공이었다. 스타성에서도 ‘엽기녀’ 전지현에 다소 밀린다. 손예진에게 따라다니는 ‘멜로 퀸’ 등의 의례적 별칭도 없다.

그리고 김혜수에게는 전지현의 ‘엽기적인 그녀’(곽재용·2001)나 손예진의 ‘클래식’(곽재용·2003)처럼, 한국영화사를 빛낸 ‘결정적 대표작’이 부재한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올곧이 여주인공에게 수렴시킬 만한 대표작이 없는 것.

아니나 다를까, 올 BIFAN의 ‘매혹, 김혜수’ 섹션에서 선보인 자천작 10선을 들여다봐도 그 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첫사랑’(이명세·1993) ‘타짜’(최동훈·2006) ‘열한번째 엄마’(김진성·2007) ‘바람 피기 좋은 날’(장문일·2007) ‘모던 보이’(정지우·2008) ‘이층의 악당’(손재곤·2010) ‘도둑들’(최동훈·2012) ‘차이나타운’(한준희·2015) ‘굿바이 싱글’(김태곤·2016) ‘국가부도의 날’(최국희·2018)이다. 이들 중 단 한 편도, 고심 끝에 필자가 뽑은 ‘한국영화 100선’에 포함되지 못했다.

아역 시절부터 빛났던 남다른 존재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러나, 상황은 달라진다. 김혜수의 위상이 급비상하는 것. 연기력은 기본이다. 비평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던 김혜수의 영화 데뷔작 ‘깜보’(이황림·1986)가 당시 회자됐던 이유는, 주인공 깜보 역 장두이가 아니라 열여섯 살 고교 1년생 김혜수의 치명적 매혹 덕분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박중훈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그 범작에서 그녀는 깜찍한 불량소녀 나영 역을 열연해 박중훈과 나란히 1987년 제2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연기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일궈냈다. 중학교 2학년 때 CF 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내디딘 지 2년 만에, 연기자로서 성공 또한 예약했던 것이다.

‘깜보’ 이후 ‘어른들은 몰라요’(이규형·1988), ‘그 마지막 겨울’(정소영·1988) 등으로 영화 출연이 계속되나, 80년대 후반 김혜수의 인기는 영화보다 방송 드라마에 의한 것이었다. 일일 연속사극 ‘사모곡’(1987·KBS2)과 52부작 주말 연속극 ‘순심이’(1988·KBS2), 85부작 일일연속극 ‘세노야’(1989·KBS1) 등이 그들이었다. 그중에는 88년 9월 24일에 방영된 서울올림픽 기념 특집 드라마 ‘춘향전’(KBS1)도 있었다. TV 드라마이긴 하나 최은희 김지미 문희 장미희 등에 이어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적 여성 캐릭터 춘향을 연기하면서 스타-배우로서 확실한 인상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

90년대 접어들며 그 성공은 영화로도 확장된다. ‘오세암’(박철수·1990)의 수녀, ‘첫사랑’(이명세·1993)의 순수 여대생, ‘닥터 봉’(이광훈·1995)의 개성적 노처녀, ‘찜’(한지승·1998)의 연상의 애인 등 다채로운 캐릭터들로 연기자로서 외연과 내포를 꾸준히 확대, 심화시켜나갔다. 비평적 시선에서 이 영화들을 수·걸작으로 평하긴 주저된다. 그럼에도 어느 영화건 예외 없이 김혜수의 존재감이 빛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첫사랑’으로 제14회 청룡영화상에서, ‘닥터 봉’으로 16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안는다. 95년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으로 3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인기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특히 ‘닥터 봉’으로 6회 춘사영화상 새얼굴 남자연기상과 3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한석규와 김혜수 간의 연기 조화는, 내가 기억하는 90년대 한국영화 최상의 ‘케미’ 중 하나다. 그 앙상블은 김혜수가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라고 밝힌 ‘이층의 악당’에서 재연된다. 김혜수의 연기나 성격화를 근거로 평할 경우, 상기 영화들은 문제작으로 승화되는 셈이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독보적 생명력

김혜수의 주목할 만한 성공은 30년 넘게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영화와 방송을 오가며, 큰 스캔들이나 별다른 부침 없이. 다름 아닌 그 ‘지속적 생명력’에서 김혜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80년대 후반부터 한동안 경쟁 구도를 형성했던 하희라는 일찌감치 그 레이스에서 떨어져나갔다. 지속적 생명력에서 부동의 한국 연예사 넘버원인 안성기의 활동성은 영화에 한정된다. 전도연 역시 영화에 집중된다. 장미희가 당장 비교 대상이 될 법하나, 지속성에서는 아니다. ‘압도적’을 넘어 가히 ‘독보적’이다.

연기 스펙트럼은 어떤가. 올 BIFAN이 “배우 김혜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매혹”이라면서 “데뷔 이래 현재까지 배우 김혜수는 다양한 이미지로 변신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관객들을 매혹시켜 왔다”고 한 바, 그야말로 적확한 진단이다. 그렇다고 김혜수의 성공가도가 순탄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98년 출연한, 곽경택 감독의 태작 ‘닥터 K’에서는 그녀 특유의 존재감을 맛보기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김상진 감독의 ‘신라의 달밤’(2001)으로 컴백하기까지, 영화를 쉬며 TV 출연에 집중한다. 월화 드라마 ‘국희’(1999·MBC), MBC 창사 39주년 특별 기획 미니시리즈 ‘황금시대’(2000), MC로 진행을 맡은 ‘김혜수 플러스 유’(1998~2000·SBS) 등이 그것들이다.

영화배우로 돌아오기 위해 김혜수에게는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했고, 여행 중이던 비행기 안에서 ‘신라의 달밤’ 시나리오를 읽고 출연을 결심했다. 그녀는 초특급 왈가닥 민주란으로 분해, 일등급 깡패 박영준(이성재)과 조폭급 선생 최기동(차승원), 영준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안달인 기동 학교의 소문난 문제아인 동생 민주섭(이종수)까지, 세 남자를 쥐락펴락한다. 영화는 관객 440만여명을 동원하는 대박을 터뜨린다. 김혜수도 생애의 흥행작을 확보한다. 그 기세는 한층 더 강력한 히트작 ‘타짜’와 ‘도둑들’로 이어진다. 고니(조승우) 평경장(백윤식) 고광열(유해진) 곽철용(김응수) 너구리(조상건) 호구(권태원) 등 온갖 잘난 사내들을 갖고 놀다시피 하는 ‘타짜’의 정마담은 또 하나의 한국영화 여성 캐릭터의 탄생이요, 김혜수의 연기의 재발견에 값한다. 돈만 훔치는 그렇고 그런 도둑들과는 달리 마음(과 세상)마저 훔치는, ‘도둑들’의 팹시는 또 어떤가. 그녀는 ‘타짜’로 27회 청룡영화상과 14회 춘사영화상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도둑들’로 한국영화기자협회가 주관하는 4회 올해의 영화상 여우조연상 등을 거머쥐었다.

이런데도 김혜수에게 대표작이 없다고? 난센스다. 외려 대표작이 적잖다고 해야 한다. 과연 어느 것이 으뜸 대표작인지 꼭 짚기 어려운 감마저 없지 않다. 그래도 세 편만 꼽아본다면 어떨까. 그 첫 번째는 기념비적 노출 연기를 넘어 한국영화사의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 지수를 탄생시킨 ‘얼굴 없는 미녀’(김인식 2004)다. 전도연에게 ‘해피 엔드’(정지우 1999)가 있다면, 김혜수에게는 이 영화가 있다. 12회 춘사영화상 올해의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42회 대종상 여우주연상, 4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김혜수 필모그래피의 전환점적 분수령!

두 번째 영화는 ‘모던 보이’다. 김혜수는 “이름도 여럿, 직업도 여럿, 남자마저도 여럿인 정체가 묘연한 여인” 모던 걸 조난실의 현현이다. 마지막 영화는? 이름 없는 엄마를 연기한 ‘차이나타운’이다. 세상에는 이런 엄마도 있다. 김혜수 아니면 체화 불가능했을 엄마 캐릭터. 3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연기상, 2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여우주연상, 21회 춘사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휩쓴 희대의 인물….

김혜수 그녀는 그 존재 자체가 다양한 캐릭터를 창조해낸, 흔치 않은 한국영화사의 톱스타다. 영화의 수준을 떠나, 늘 최상의 연기를 선보여온 아름다운 배우다.

<전찬일 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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