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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플랜이 있습니다”… 美 항구도시 열광의 도가니

엘리자베스 워런 미 민주당 상원의원이 18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항구도시 노퍽의 차트웨이 아레나에서 열린 선거유세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워런 의원은 현재 미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때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며 준비된 후보임을 내세웠다. AP연합뉴스


유세 후 하윤해 특파원과 포즈를 취한 워런 의원.


지지자들은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정치가, 그리고 자신의 삶이 좋아질 것이라고 진짜 믿는 듯했다. 이 믿음이야말로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이 지금의 미국 대선 구도를 뒤흔드는 힘으로 보였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항마를 뽑는 민주당 경선 구도는 워런 상원의원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양강 구도다. 하지만 워런이 ‘뜨는 별’이라면, 아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연루된 바이든은 ‘지는 별’이다. 일각에서는 워런이 돌풍을 넘어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내놓는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정치인인 워런이 18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항구도시 노퍽을 찾아 선거유세를 진행했다. 행사는 오후 6시부터 시작됐으나 행사장인 차트웨이 아레나에는 오후 2시부터 지지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 국민 아닌 대기업 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출신인 워런은 미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연설을 이어갔다. 칼날의 대상은 정치권과 정부였다. 워런은 “과거에는 최저임금으로 미국 3인 가정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2인 가정도 생활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어 “워싱턴은 부패에 젖어 있으며 돈에 따라 움직인다”며 “미국 정부는 국민이 아니라 대자본을 위해 일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곤 잠시 말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지지자들의 이목이 워런에 집중됐다. 워런은 기다린 듯 “나는 그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I have a plan for that)”라고 외쳤다. 지지자들은 콘서트장의 관객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워런이 입버릇처럼 했던 이 말은 이제 유행어가 됐고 워런을 상징하는 슬로건으로 거듭났다. 워런이 유세에서 이 말을 꺼낼 때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이 글귀를 적은 티셔츠까지 팔린다. 현장에서 만난 지지자 토리 던은 “이것이 워런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던은 “워런은 미국의 문제를 정확히 알고,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병폐를 고칠 워런의 처방전은 ‘부유세’(wealth tax)다. 자산 5000만 달러(약 590억원) 이상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2%의 부유세를 걷겠다는 것이다. 워런의 대표 공약이자 반대 세력이 가장 물어뜯는 공약이다. 워런이 내세운 부유세가 시행되면 향후 10년 동안 약 3조 달러(약 3500조원)의 세수가 확보될 것으로 추산된다.

워런은 이날 “부유세 대상에는 렘브란트 명화를 가진 사람, 다이아몬드와 요트를 가진 사람들도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돈과 주식뿐만 아니라 모든 자산 가치의 합계가 5000만 달러를 넘는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걷겠다는 얘기다. 워런은 반격을 의식한 듯 “부유세 대상자는 미국 전체 인구의 0.1%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또 부유세의 세율이 2%인 점을 거론하면서 “1달러가 있으면 겨우 2센트를 더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갑부들에게 2% 세율은 큰 부담이 아니라는 논리다.

그러면서 워런은 “부자의 2센트가 많은 것을 바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유세에서 워런이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대목이었다. 워런은 “(부유세가 시행되면) 4년제, 2년제를 포함해 모든 대학교육이 무료가 될 수 있다”면서 “영·유아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무상 보육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지지자인 도나 캠프는 “워런의 부유세는 포퓰리즘과 다르다”면서 “그는 정부 돈을 풀지 않고 재원을 마련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워런은 부자의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현대판 로빈 후드’로도 불린다. 이 표현은 찬사이기도 하고, 비아냥이기도 하다.

트럼프 공격은 자제, 자본 때리기

워런은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리지는 않았다. 대신 워런은 미국 정치의 기본구조를 바꾸겠다고 말했다. 워런은 “우리는 부패와 맞서 싸워야 한다”면서 “나는 그에 대한 계획이 있다”고 역설했다.

워런은 “거대 기업과 이익 집단의 로비를 끝내야 한다”면서 “월가와 워싱턴 사이의 연결도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연방정부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은 세금 기록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대 기업에 대한 비판도 이어갔다. 워런은 “거대 기업이 미국 경제를 잡아먹고 있다”며 “거대 기업은 노동자들을 파멸시키고, 소비자들을 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더 많은 힘이 부여돼야 한다”며 “우리는 미국 중간층을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런이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지 않은 것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아픈 개인사 공개하며 감정 호소

워런은 자신이 흙수저 출신임을 강조했다. 워런은 “어렸을 때 선생님이 꿈이었다”면서 “인형들을 앞에 두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12살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이후 아버지가 일을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19세에 만났던 첫사랑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던 얘기도 공개했다. 현 남편인 브루스 만도 유세장에서 이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한때 ‘항상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워런은 “공부하는 것조차 암담했던 한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기 위해 나섰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연설 도중 지지자들은 ‘꿈은 크게 꾸고, 싸움은 열심히 하자(Dream Big, Fight Hard)’는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흔들어댔다.

노퍽(미국 버지니아주)=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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