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장르·이념 넘어 보편적 가치 추구한 ‘한국 교향악 대부’





운파(雲波) 임원식(1919~2002·사진)은 ‘한국 교향악의 대부’라 불린 지휘자다. 그는 해방 후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 교향악단(현 서울시향의 전신)과 한국전쟁 후 KBS 교향악단을 이끌며 민간 교향악 부흥에 힘썼다. 후진 양성에도 공을 들여 국내 최초의 예술전문 고등교육 기관인 서울예고의 초대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하지만 그가 지녔던 코즈모폴리턴 사상, 이데올로기와 장르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가 민족주의 대 제국주의, 좌익 대 우익으로 분열된 한국 사회사의 흐름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음악적 커리어가 한반도가 아닌 해외에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그의 주요 무대는 만주, 그중에서도 하얼빈이었다.

1930년대는 동아시아에 서양의 신문물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특히 하얼빈은 러시아인, 일본인, 중국인으로 구성된 하얼빈 교향악단을 필두로 국제적인 음악도시로 명망이 높았다. 임원식은 바로 이 하얼빈 교향악단에서 편곡을 도맡아 하다가 지휘자로 데뷔했으며,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정기공연 무대에 오르게 됐다. 지금도 하얼빈 음악 박물관에는 하얼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임원식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왔다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쇤베르크, 쿠세비츠키 등으로부터 음악은 물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물려받았다. 그는 클래식 음악가였지만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존경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가 찬송가를 피아노로 연주하다 재즈로 편곡해 즉흥연주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음악과 사람 양쪽 모두에 적용된 그의 공정한 시각은 60년대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된 작곡가 윤이상 구명운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다수의 국내 음악가들이 침묵하는 와중에 그는 윤이상의 구명운동을 펼치고 재판정에 서서 그의 무고함을 호소했던 유일한 음악가였다. 윤이상이 독일로 망명하고 난 뒤에도 윤이상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자 힘썼다. 특히 79년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개최된 베를린 심포니 공연에 객원지휘자로 초청됐을 때는 첫 곡으로 윤이상의 ‘무악’을 연주하며 독일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94년에는 윤이상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한국 초연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행보는 결국 독으로 돌아왔다. ‘반정부 성향이 의심된다’는 여론에 휩쓸리면서, 출중한 음악성과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 활동은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떠난 지금 그의 손길이 닿은 악단들은 모두 세계를 누비고 있고, 그를 위협하던 남북관계는 변곡점을 맞고 있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어떤 감회를 느꼈을까? 오는 18일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그가 56년 상임지휘자로 임명돼 71년까지 지휘봉을 놓지 않았던 KBS 교향악단의 무대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숙명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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