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사  >  월드

[특파원 코너-노석철] 두 번 당하지 말자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청을 조선에서 배제하고 랴오둥반도와 대만 등을 전리품으로 얻어 득의양양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유럽 동맹국들과 연대해 랴오둥반도가 일본에 귀속되는 것을 막았다. 랴오둥반도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던 일본은 이를 굴욕으로 여겼다. 이후 일본이 힘을 키우고 치밀한 외교전략으로 러시아에 앙갚음을 하는데 딱 10년이 걸렸다.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이던 발틱함대를 격파했다.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은 노골화됐다. 그게 일본의 패망을 부른 태평양전쟁의 서막이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일본의 침략 DNA와 10년을 준비한 보복이다. 일본은 고려시대부터 우리 해안에서 노략질이나 하던 왜구(倭寇)에서 침략자로,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로 힘을 불렸다. 그만큼 일본의 침략 DNA는 뿌리깊다.

일본이 한국 반도체산업의 핵심 소재에 대해 수출 규제를 강화키로 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가장 먼저 “이건 침략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가 징용 문제를 제기하자 도리어 경제력과 기술력을 무기로 전쟁을 걸어오는 격이기 때문이다. 사드(THAAD) 배치 문제로 중국이 한국에 보복을 하니까 일본도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저러나 하는 분노까지 치민다. 우리도 과거 일본이 러시아를 제압했던 것처럼 조용히 힘을 길러 일본에 앙갚음을 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물론 일회성인지 모를 한·일 갈등에 너무 과민 반응인지는 모르겠다. 아베 신조 총리가 오는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지층 결집을 위해 한국 때리기에 나섰다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일본의 이번 조치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나라가 마치 동네북으로 인식돼 아무나 때려도 된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청나라, 일본, 러시아에 치이던 때와 비슷하다는 우려가 회자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사드 갈등 때 미국을 겁내는 중국의 분풀이 대상이 됐다. 미국이 맞아야 할 매를 우리가 대신 맞았다. 그래도 거대한 시장을 가진 중국에 할 말도 못했다.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가 나오자 한국 여론이 분분하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해 일본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주장이 있고, 아베 총리의 선거 전략에 휘말릴 수 있으니 과잉 대응하지 말자는 반론도 나온다. 장기적으로 수입 다변화로 무력화시키자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힘의 논리다. 우리도 일본에 보복할 힘이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도 아니면 다신 이런 굴욕을 당하지 않게 힘을 길러야 한다. 아베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을 G20 만찬장 뒷자리에 앉히는 속좁은 행태를 드러내면서도 미국에는 ‘입안의 혀’처럼 굴며 한껏 저자세로 환심을 사려 하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힘이 부족하니 계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끌려다니는 굴욕을 당하는 게 아닌가. 힘센 나라가 곧 법인 셈이다.

우리 정치권을 보면 갑갑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처럼 우산쓰고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일본에 푸대접받아 ‘국민들 욕먹인다’고 비난하지를 않나. 한·일 회담을 거부하는 아베 총리의 속좁음을 비난하지 않고 무조건 우리 정부 탓만 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우리 사법부에서 ‘징용 판결’을 내렸는데, 일본 눈치를 보며 사법부 결정이 잘못됐다고 얘기하란 말인가.

누워서 침뱉기에 몰두하지 말고 어떻게 나라의 힘을 키울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우리 정부도 공허한 담론에 자꾸 얽매이지 말고 미래의 먹거리를 만들고 국력을 키우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 한다. 미래에 돈되는 분야라면 모든 규제를 풀고, 원자력산업도 다시 부흥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북유럽 국가처럼 편안한 여건에서 산다면 모르지만 동북아는 맹수가 득실거리는 정글이나 마찬가지다. 과거 일본이 러시아를 잡았던 것처럼 우리가 10년, 20년 뒤에 힘을 키워 일본을 제압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