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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하윤해] 올랜도 단상



미국이 2020년 대통령 선거라는 블랙홀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 내년 11월 3일에 실시되니, 앞으로 1년하고도 4개월이 더 남았는데, 대선전이 조기에 과열되는 분위기다. 한국도 정치과잉 사회지만 미국이 한국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미국의 정치는 분열과 불신이라는 부정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중심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있다. 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8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올랜도 암웨이센터에서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했다.

재선 출정식 하루 전날인 17일, 올랜도에는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내렸다. 비가 그친 뒤 암웨이센터를 찾았더니 이미 수백명의 지지자들이 텐트와 우산을 들고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앞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를 보기 위해 밤을 새우기로 작정한 열성 지지자들이었다. 대부분 플로리다주 주민들이었다. 또 블루칼라로 보이는 백인 중장년층이 다수였다.

40대 백인 남성 지지자에게 말을 걸자 “당신의 한국 신문사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처럼 가짜뉴스(fake news)를 쓰는 곳은 아니지?” 하는 물음이 돌아왔다. 그러곤 “미국 언론들은 거짓말만 쏟아낸다”고 투덜거렸다. 지지자들이 응원하는 정치인을 닮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출정식 연설에서도 미국 주류 언론들을 비난했다. 60대 여성 지지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막말을 솔직함이라고 옹호했다. 그는 “워싱턴이라는 시궁창(swamp)에 있는 정치인들은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서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들을 위해 가장 솔직한 말을 하는 정치인”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출정식에 대해서도 특유의 과장법을 썼다. 그는 수용 규모 2만명인 암웨이센터에 “10만명 이상이 참가신청을 했다”면서 “못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야외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출정식엔 2만명이 조금 넘는 사람이 참석한 것으로 보였다. 암웨이센터는 가득 채웠지만, 야외는 한산했다. 하지만 출정식 장내 열기는 뜨거웠다. 트럼프 대통령이 야당인 민주당과 언론에 대해 비판 수위를 높일수록 지지자들은 더 큰 박수로 화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분열의 데시벨을 높일수록 환호는 더 높아졌다. 미국 언론들은 “새로운 공약은 없이 공격과 불평으로 출정식을 치렀다”고 지적했다. 정치인과 지지자들은 상호 작용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강력한 단어를 쓸수록 지지자들은 환호하고, 그런 지지자들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은 더 강력한 자극제를 내놓는다.

재선 출정식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약점으로 ‘오락가락’과 ‘예측 불가능성’을 꼽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랑처럼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을 실행 10분 전에 중단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변덕스럽게 정책을 전환하면서 적국은 물론 동맹국들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이란에 대한 공격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10분 전에 공격 계획을 취소했음을 치적처럼 공개한 트럼프 대통령의 사고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면서 북·미 대화 재개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런 호의적인 스탠스가 얼마나 이어질지 장담하기 힘들다. 특히 대통령 선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북핵 이슈 정도는 잠시 방치해도 상관없다는 기류가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흐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 기간 비무장지대(DMZ)를 전격 방문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올랜도에서 만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성공”이라며 “북한 이슈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처럼 믿기 힘든 상대는 없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이유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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