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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같은 삶 살았던 1세대 여성 운동가 이희호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1988년 장남 홍일씨, 차남 홍업씨 가족과 함께 통일전망대를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독재 정권 치하에서 감옥과 연금,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김 전 대통령 곁을 지켰다. 김대중도서관 제공


퍼스트레이디, 여성운동가, 민주화운동가. 10일 타계한 이희호 여사는 어느 한가지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풍성하고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100년에 가까운 이 여사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와 맞물렸다. 이 여사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의 동반자였고, 든든한 동지였다. 영부인으로서의 삶 못지않게 여성운동가, 민주화운동가의 삶에서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자서전의 부제처럼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와 같은 삶을 살았다.

이 여사는 1922년 서울에서 6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화고등여학교와 이화여전 문과,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한 이후 미국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미국 스카릿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노스이스턴대학과 워시본대학, 코럴릿지배티스트대학,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남녀 차별이 극심했던 그 시대에서는 찾기 어려운 인텔리 여성이었다. 이 여사는 여학교 시절에 대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상한 바 있다.

이 여사는 영부인이 되기 전까지는 사회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였다.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회, YWCA연합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 많은 단체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 하기 등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힘썼다. 특히 여성·아동·노인·장애인 등 소외된 사람들의 빈곤과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미국 유학파 엘리트 여성’의 삶의 경로를 바꿨다. 이 여사는 2살 연하였던 김 전 대통령과 1962년에 결혼했다. 이 여사는 초혼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촉망받던 여성운동가였던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하면서 고난으로 가득 찬 민주화 운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에 대해 “우리는 정말 서로 인격을 존중했어요. 늦게 결혼했고, 결혼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참 좋은 분을 만나서 내 일생을 뜻있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감옥과 연금, 타국에서의 망명 생활을 할 동안 한결같이 김 전 대통령의 곁을 지켜 왔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수감 시절, 두 사람이 주고받은 ‘옥중서신’은 사적 편지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편지에는 남편을 걱정하는 애타는 심정뿐만 아니라 국내외 정세와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1998년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 여사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 여사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적극적인 영부인이었다. 이 여사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행정부에도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이후 여성부로 격상됐다. 장관 임명장 수여식 때는 부부 동반으로 임명장을 받는 새로운 문화도 생겨났다.

2009년 8월 18일, 평생의 동지였던 김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회복을 기도하면서 김 전 대통령을 위해 털실로 양말과 장갑을 짰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회복하지 못하고 하늘로 갔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관에 편지와 성경책, 손수건을 넣었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0년 만에 이 여사도 하늘로 돌아갔다.

임성수 김성훈 기자 joyl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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