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 문제와 관련한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공개한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과 강 의원에게 이를 발설한 외교관의 행위를 두고 청와대와 한국당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한국당은 강 의원이 공개한 내용이 국민적 관심사인 만큼 강 의원의 행위가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의정활동이라고 주장한 반면, 청와대와 정부는 “정상 간 통화 내용은 3급 국가기밀”이라며 기밀 누설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한국당은 23일 국회에서 열린 당 회의에서 청와대와 외교부가 강 의원에게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발설한 주미 한국대사관 소속 참사관 K씨에 대한 감찰을 벌인 것과 관련해 “구걸 외교의 민낯이 들키자 공무원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한·미 정상 간에 어떠한 내용이 오갔느냐는 건 국민의 알권리에 해당한다. 우리가 밝혀낸 내용을 보면 이 정부의 굴욕 외교의 실체를 보여준 공익적 성격이 강하지 않느냐”며 강 의원을 엄호했다.
강 의원은 지난 9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미국 외교 소식통을 통해 파악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5월 하순 방일 직후 한국을 들러 달라고 제안했으며, 우리 정부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단독 방한을 거절했다고 폭로했다. 강 의원은 23일 자신의 행위에 대해 “모든 정보를 숨기고 있는 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야당 의원의 의정활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정상 간 통화 내용은 3급 국가기밀에 해당한다”며 “대외 공개가 불가한 기밀이 누설된 것은 한반도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당이 공익적 성격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도 이 관계자는 “유출한 K씨도 기밀 누설을 시인했다”면서 “부정과 비리를 외부에 알리는 공익제보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비판했다. K씨는 합동감찰반 조사에서 강 의원이 먼저 한·미 정상의 통화 내용을 알려 달라고 요청해서 내용을 알려줬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가에서도 강 의원과 K씨의 행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아직 성사되지 않은 양국 간 제안이 공개된 것은 외교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자신이 관련 정보를 강 의원에게 보고할 위치에 있지 않은 K씨가 정상 간 통화 내용을 강 의원에게 전달한 것도 부적절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김숙 전 주유엔대사도 “외교안보 사안은 국민의 알권리도 중요하지만 국익과 안보가 같이 고려돼야 하는데, 강 의원이 공개한 정보가 국민의 알권리를 우선할 정도로 시급한 사안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한국당 소속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민감한 시기에 국익을 해치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강 의원을 비판했다.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일제히 “외교기밀 누설은 중대한 국기문란 행위”라고 비판했다. 형법 113조는 외교상 기밀을 누설한 자에 대해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선고할 수 있으며, 기밀을 탐지·수집한 자 역시 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치권과 외교가에서는 강 의원 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미 양국이 공개하지 않은 정상 간 통화 내용이 우리 측에서 유출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미국과 우리 측 외교안보라인의 정보 교류가 위축될 수 있다는 취지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