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사  >  종합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전체의 0.45% 70명 불과… 베델·스코필드가 대표적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왼쪽)과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스코필드는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배설선생기념사업회·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제공


외국인 독립유공자 추가 발굴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다. 수가 많지 않은 데다 100년 전에 활동한 이들의 공적을 사료로 입증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는 외국인은 70명뿐이다. 전체 독립유공자(1만5511명)의 0.45%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한국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적 외국인 독립유공자로는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 한국명 배설)과 캐나다 국적의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 선교사가 꼽힌다.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베델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렸다. 일제는 서양인인 베델의 언론 활동을 쉽게 탄압할 수 없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3·1운동 현장 사진을 직접 찍어 해외에 알렸고,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현장에도 찾아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가 쓴 ‘제암리의 대학살’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 발행되던 영자신문에 실렸다.

베델과 스코필드의 후손을 비롯한 외국인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지난 2월 보훈처 초청으로 방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외국인 독립유공자들의 헌신도 민주공화국의 역사를 여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사의를 표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가운데 일본 국적의 2명도 눈에 띈다.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1880~1953)와 가네코 후미코 여사다. 후세 선생은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 유학생 변론을 시작으로 줄곧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다. 그는 가네코 여사가 일왕 암살 기도로 구속됐을 때도 변론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의 국적은 중국이 33명(47.1%)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지원한 장제스 등 중국 지도자들이 많이 포함됐다. 이어 미국 21명(3%), 영국 6명(8.57%), 캐나다 5명(7.14%), 아일랜드와 일본 각 2명(2.86%), 프랑스 1명(1.43%)이다. 전체 70명 중 16명(22.86%)은 2000년 이후 발굴됐다. 보훈처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외국인 독립유공자 발굴이 쉽지는 않지만 올해도 일부 심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판 기자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