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세기말에 터진 포크와 록의 ‘황홀한 만남’


 
가수 안치환의 이름 앞에는 ‘시대의 노래꾼’이라는 수식어가 붙곤 한다. 19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거쳐 90년부터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호소력 짙은 음색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절절하게 녹여낸 곡들을 발표하며 사랑을 받았다. 뉴시스
 
안치환의 대표곡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담긴 5집 음반 재킷. 뉴시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나를 찾고자 현란한 언어에 휩쓸려 이 거리를 떠돌고 있을 때/ 덧없는 청춘의 십자가여 너를 부여 나는 울었네….”(안치환의 ‘고백’ 중에서)

1970년대 대학가가 김민기와 한대수라는 청년문화의 기수를 낳았다면 80년대의 대학가 노래패 출신들이 결집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은 김광석과 안치환이라는 90년대 쌍두마차를 배출했다. 진보적인 감수성의 대표적인 목소리로 부상했던 안치환이지만 90년대, 혹은 제도권 시장으로의 진입은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김광석의 경우와는 달리 순탄치 않았다.

안치환이 돌고 돌아 도착한 곳

‘저 창살에 햇살이’와 ‘백두여! 한라까지, 한라여! 백두까지’, 그리고 이건용 교수의 작품 ‘그렇지요?’가 포진한 90년의 데뷔 앨범은 80년대 안치환이 쌓은 카리스마에 머물러 있었다. 독립영화 ‘파업 전야’의 주제 음악과, 역시 80년대에 즐겨 다룬 레퍼토리를 엮은 두 번째 앨범은 정교한 완성도를 요청하는 대중의 검열을 통과하기엔 뭐가 뭔지 모를 정도의 난맥상을 보였다.

김광석은 이념 투쟁과는 동떨어져 있던 아기자기한 포크록 그룹 ‘동물원’의 일원으로 두 장의 성공적인 앨범을 통해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김광석의 이런 행보는 이른바 386세대에게는 배신으로 느껴졌다. 이들에게 김광석은 이념과 현실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스타덤에 투항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김광석은 70년대 선배들이 물려준 통기타 정신을 버리지 않았으며, 소극장 장기 공연을 통해 통기타의 저항성과 대중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운동권의 퇴조라는 시대적 분위기에도 여전히 신념을 버리지 않은 진보 진영의 대중은 자신들의 기대를 안치환에게 걸었지만, ‘노찾사’를 탈퇴하고 솔로로 거듭난 안치환은 좀처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미학적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와 같은 안치환의 부진은 뚝심 있는 대안의 선두주자로 그를 지목한 많은 지지자를 절망에 빠뜨렸다. ‘솔아! 푸르른 솔아’ ‘잠들지 않는 남도’ ‘마른 잎 다시 살아나’처럼 주옥같은 노래들을 탄생시킨 농밀한 언어 감각과 선율 포착 능력은 그가 김민기의 후계자로 승인되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치환은 절치부심 끝에 완성한 93년의 세 번째 앨범을 통해서 기대에 부응한다. 오랫동안 저항문화의 참호로서 역사적 소임을 담당해 온 대학문화가 대중문화와의 차별성을 상실해 가던 때였다. ‘노찾사’와 ‘꽃다지’가 더 이상 대중적 영향력을 재생산시키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해 5월에 안치환은 서두에 언급한 ‘고백’을 앨범 앞머리에 놓으며 성찰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깊은 울림을 동반하는 ‘내성(內省)’은 비단 이 곡에 한정된 게 아니었다. 앨범의 전면을 관통하는 정신이었다. 그는 류시화(‘소금인형’)와 정호승(‘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고 나희덕(‘귀뚜라미’)의 시를 가져와 그가 속했던 진영의 노래들이 그동안 몰각했던 응시의 미학을 성립시킨다. 레코드판을 뒤집으면 김남주의 시 ‘자유’에 붙인 특유의 사자후가 터진다. 안치환은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옴으로써 오히려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한 것이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비록 만족스러운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2년 후 록의 파괴력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이른바 386 세대의 감수성을 거의 유일하게 방어하고 있던 싱어송라이터 안치환의 텍스트는 세기말 한국 대중음악이 거둔 가장 소중한 몇 가지 중 하나였다. 그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유효한 진보적인 이념과 대중성의 이인삼각 경주를 거의 유일하게 성립시킨 뮤지션이었다. 아울러 로큰롤의 에너지와 포크의 수사학을 독자적으로 구축했고, 앨범과 라이브의 균형을 성취해냈다.

그가 90년대에 발표한 음반 7장의 분기점을 이루는 이 앨범은 김남주와 정호승, 나희덕 같은 시인들로부터 받은 고귀한 서정성과 생명력 넘치는 감정이입이 극적으로 용해된 진정한 걸작이었다. 깊은 울림을 동반하는 ‘고백’과 뒷면의 서두를 장식하는, 그리고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자유’의 격렬함이 자아내는 대비는 누구로부터도 선사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90년대의 속도 경쟁이 학살해 버렸던 진지한 노래 정신에 대한 복원 그 자체였다.

안치환의 록 세계가 맺은 열매

그는 60년대 중후반의 밥 딜런이 그랬던 것처럼 포크의 진정성에 록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여전히 무대의 중앙에서 통기타를 메고 있지만, 안치환의 주위엔 그가 결성한 ‘자유’라는 록밴드가 들어섰다. 그는 밴드와의 화학적인 결합을 4집과 5집을 통해 극적으로 성공시킨다.

‘수풀을 헤치고’와 ‘당당하게’ 같은 95년 4집의 록 넘버들은 이 앨범의 상업적인 성공을 견인한, 서정적인 ‘내가 만일’과 포크 시대의 향수를 진화시킨 ‘너를 사랑한 이유’에 비하면 습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전작 ‘자유’에서 맛보았던 로큰롤의 속도와 폭발력을 한층 끌어올렸으며 이와 같은 록 에너지는 97년 5집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 이르러 황홀한 열매를 맺는다.

이 노래는 그가 발표하기 전에 작곡가로서 ‘꽃다지’에 제공한 노래였다. 전형적인 투쟁가 밴드인 ‘꽃다지’의 버전은 나름대로 운동권 투쟁가의 세련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 곡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펼쳐 보이는 데엔 무언가 아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안치환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자유와 더불어 편곡과 연주, 무엇보다도 격렬한 보컬의 파괴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마스터피스를 완성한다. 아마도 안치환 버전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자신의 곡을 리메이크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시인 정지원의 시에 곡을 붙인 이 노래는 ‘바위처럼’ 이후 사위어가고 있던 운동권 노래 문화의 새로운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텍스트가 얇디얇은 한국 록 진영에도 단비와 같은 자양분을 제공했다. 김광석과 더불어 비판적인 통기타 정신의 90년대 수호자 위상을 지니고 있던 안치환만큼 시에 자신의 음악을 결합시키는 재능을 지닌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노랫말 선율 리듬 보컬이 가장 최선의 지점에서 만난 극히 드문 예 중의 하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71년의 ‘아침이슬’과 대구(對句)를 이루며 한국 청년문화의 드높은 깃발이 됐다. 그리고 이 노래는 대중음악 시장과 진보진영이 만나 성공을 거둔, 어쩌면 마지막 노래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이 노래가 발표되던 시기에 가요계 상황은 어땠는가. 김광석은 떠났고, ‘서태지와 아이들’과 ‘넥스트’는 해체했다. 그 빈자리를 ‘패닉’과 윤도현이 메우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세상은 ‘H.O.T.’와 ‘젝스키스’로 상징되는 아이돌 그룹의 예쁘고 화려한 군무가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노래는 더 이상 진정성을 담는 미학적 용기가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일회용 상품일 뿐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후일담은 가슴 아픈 그림자를 동반한다. 이 노래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한국에서는 사람의 노동 가치를 손쉽게 사고팔 수 있도록 무장해제 시키려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졌다. 초국적 자본의 명민한 전략에 의해 대한민국의 금융 체제가 초토화됐다. 수많은 노동자가 직장과 거주지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잔인한 현실은 여전히 사람의 가치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안치환은 이 노래 이후로 더욱 외로워질 게 분명했다. 이제 그의 동료들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정태춘은 지쳤고, 조동진을 구심으로 하는 하나음악 사단은 날로 위축됐으며 운동권 출신의 예술가들은 주소지가 불명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시종여일 자신의 길을 사수했다. 이 노래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어쩌면 여전히 약탈적인 ‘지금-여기’의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강헌<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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