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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피를 관료의 펜으로 저울질 하지 말라

강 소방경의 유족이 지난해 5월 영결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영결식은 고인이 근무했던 익산소방서에서 열렸다. 뉴시스


전북 지역 소방관 300여명은 고(故) 강연희 소방경의 위험직무순직이 부결된 것에 반발해 지난 4~15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남원소방서 정은희 소방관. 익산소방서 제공


익산소방서 정은애 인화119안전센터장. 익산소방서 제공


취객의 폭언·폭행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다 숨진 고(故) 강연희 소방경(당시 51세)의 죽음은 1주기를 약 한 달 앞둔 지금까지도 ‘심사 대상’이다. 공무상 사망은 인정됐는데 다음 단계가 문제였다. 위험직무순직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그만큼 ‘위험한 죽음’이었는가. 1심의 답은 “아니다”였다.

19년 차 베테랑 소방관이었던 고인은 지난해 5월 1일 뇌동맥류 파열 등으로 사망했다. 전북 익산에서 주취자 이송 업무 중 겪은 극심한 충격과 스트레스 때문에 구토·어지러움·딸꾹질 증세를 보이다 뇌출혈로 쓰러진 지 30일 만이었다. 공무상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라며 일반 순직이 인정됐지만, 위험직무순직은 부결됐다.

‘피는 펜보다 강하다’

인사혁신처는 지난달 15일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 결과 강 소방경의 사망은 위험직무순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동료들은 분노했다. 단지 결과에 불복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일선 소방관의 위험직무순직 여부를 결정할 심의 위원에 현장전문가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고인의 직속상관이었던 정은애 전북익산소방서 인화 119안전센터장은 지난 20일 통화에서 “심의 결과를 듣고 위원들이 현장의 실상을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심의 과정에서 유족, 또는 소방관계자가 진술할 기회가 없었다. 현장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위험직무순직은 생명·신체에 대한 고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무를 수행하다 입은 재해가 직접적 원인이 되어 사망했을 때 인정된다. 이를 결정하는 곳은 의료전문가, 법조인 등의 위원으로 구성된 인사혁신처 소속 공무원재해보상심의회. 가결될 경우 일반 순직보다 더 많은 보상금과 연금이 유족에게 제공된다. 유족은 지난 4일 재심을 청구했다.

현장전문가가 심의 위원에 포함됐더라도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정 센터장과 전북 지역 소방관 300여명은 이 같은 의문에 거리로 나섰다. 지난 4~15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했다. ‘피는 펜보다 강하다’고 적힌 피켓도 들었다. ‘피’는 현장소방관의 애환과 땀, ‘펜’은 관료 중심적 사고와 권위주의 행정을 뜻한다. 고인의 죽음을 펜으로 저울질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위험직무순직 요건 두고 ‘시각차’

인사혁신처는 불승인 설명자료에서 “고인의 기저질환인 뇌동맥류가 폭행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에 의해 악화돼 사망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찰이 강도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경우’와 같이 기존 위험직무순직 인정 사례를 예로 들었다. 강 소방경의 경우 ‘고도의 위험 상황’이 아니었고, 폭행으로 지병이 악화된 것은 맞지만 사망의 직접 원인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흉기에는 찔려야 하는 거구나. 국가로부터 “수고했다”는 격려라도 들으려면 그 정도는 당해야 하는 거구나. 국가가 당연히 소방공무원의 희생을 인정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 센터장에게 불승인 결정은 큰 충격이었다. 정당한 보상조차 없다니. 온갖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힘이 빠졌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던 강 소방경은 사건 이후 폭언·폭행의 과정에서 들은 욕설이 자꾸 떠올라 “잠을 못 자겠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정 센터장은 “강 소방경이 사건이 일어난 날부터 아프기 시작한 것을 동료들 모두 똑똑히 지켜봤다. 왜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고만 하느냐”고 답답해했다.

1심은 현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내린 일방적인 결론이라는 게 정 센터장의 생각이다. 그는 “주취자의 경우 보통 사람보다 흥분해 있을 때가 많다. 순식간에 폭행을 저지르기도 한다”며 “경찰과 달리 소방관은 아무런 호신장구도 없이 구급차라는 좁은 공간에 무방비 상태로 있게 된다. 재발방지 대책도 없이 계속 폭언 등에 노출되면 신체 변화나 질병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사한 경험은 정 센터장에게도 있었다. 그는 “민원인에게서 들은 욕설 때문에 호흡이 어려워져 병원 치료를 받고 안정을 찾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1심의 부결 사유가 구체적이지 않은 점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25일 “(심의 결과가) 업무 자체에 대한 판단은 아니었다”며 “(고인의 사례는) 법에서 정한 위험직무순직 요건에 조금씩 어긋났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했지만 “종합적으로 검토해 부결이 난 것이라서 어떤 한 사항을 집어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부결 사유 불명확, 재심선 달라야”

릴레이 시위는 애초 재심이 열리는 다음 달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13일 인사혁신처 측이 마재윤 전북소방본부장과의 면담을 통해 요구를 일부 수용키로 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황서종 인사혁신처장도 이틀 뒤인 1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시위는 이날부터 잠정 중단됐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강 소방경의 재심 때는 소방관계자나 유족, 또는 유족대리인의 진술을 듣는 절차가 마련된다. 내부에서 팀을 구성해 현장조사도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전·현직 소방관 등 현장전문가가 심의 위원으로 투입되려면 시간이 더 걸릴 전망이다. 담당관은 “위원 위촉이라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신 이번 재심에서는 기존 위원 내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겠다는 방침이다.

정 센터장은 “변화 의지를 보여주신 것에 감사하지만 지켜볼 것”이라며 “1심은 부결 사유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과정과 결과를 납득할 수 있게 해주면 재심은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다만 “현장조사 결과 등을 보고도 부결한다면 소방공무원들의 허탈감이 상당할 것”이라고 털어놨다.

아울러 “소방대원은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라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한다. 사망할 경우 가족이라도 예우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며 “그런데도 100% 확신할 수 있는 위험 현장에 대해서만 위험직무순직을 승인다면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도 보다 폭넓은 범위에서 위험직무순직 심의가 논의돼야 한다고 말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폭언·폭행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외상 후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이런 것들이 누적될 경우 심각한 고통을 유발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며 “이런 경우 위험직무순직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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