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지금, 미술] 배우로 가수로 화가로… “그냥 그려요, 몸이 편안해질 때까지”

‘딴따라 미술인’으로 불리는 백현진 작가가 최근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백현진 작가가 작사·작곡한 ‘뮤지컬: 영원한 봄’을 부르며 벽화를 그리는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권현구 기자


연초 종영된 MBC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서 인정사정없는 느물느물한 개장수 ‘성환’을 눈여겨본 시청자라면 그 배우가 화가라곤, 그것도 미술계에서 꽤 잘 나가는 작가라곤 상상도 못했을 거다.

‘딴따라’ 작가 백현진(47).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 후보가 됐을 때 최종 상을 거머쥔 송상희 작가가 “딴따라랑 같이 후보가 될 줄 몰랐다”며 놀려먹었던 그 작가다.

백현진은 대학 졸업장이 없다. 대학 중퇴다. “하도 결석했더니 어느 날 제적 통지서가 날아왔더라고요.”

홍익대 조소과 94학번인 그가 미술보다 먼저 빠졌던 것은 음악이다. 대학에 입학한 그해 장영규, 원일과 인디밴드 ‘어어부 프로젝트’를 결성했다. 영화감독 박찬욱-미술작가 박찬경 형제가 아이폰으로 제작한 첫 단편 영화 ‘파란만장’에도 이 밴드가 나온다. 누군가의 평처럼 “춤도 뭣도 아닌 몸짓에 가까운 움직임, 노래도 괴성도 아닌 목소리”를 들으면 중독성 있는 어떤 매력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영화와 드라마에 제법 출연해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에서도 중년의 닳고 닳은 최 교수를 감쪽같이 연기했다. 미술가, 뮤지션, 배우의 1인 3역을 한다. 그만큼 끼가 있다.

‘열일하는 작가’ 백현진을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 최근 만났다. 이번 전시는 회화가 주를 이룬다. 최근 2년 사이에 열린 전시는 설치와 퍼포먼스, 사진 위주였기에 “백현진이 회화를?”이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그런데 전통적 장르인 회화를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가 캔버스에 담고자 하는 것은 풍경이나 인물 등의 현실을 옮기는 재현이 아니다.

“재현을 하듯 구상적인 것을 그리는 데는 관심 없어요. 말 그대로 그냥 그려요. 그렇다고 추상화도 아닙니다.”

그럼 뭔가. “딱히 뭘 그려야겠다는 생각도 없어요. 계획 없이 시작해요. 아무 물감이나 짜서 색깔도 안 보고 시작하기도 해요. 캔버스 표면에 뭔가 기록이 되면 그 결과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그 위에 뭔가를 또 그려요.”

어떤 큐레이터는 그의 작품 세계를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유행했던 다다이즘의 자동기술적 회화에 빗대기도 한다. 당시 화가들은 색종이를 흩뿌린 뒤 그걸 붙여 작품이라고 했다. 백현진은 “패턴처럼 보이지만 패턴이 될 수 없는 무엇을 그려봐야지 했다”고도 말했다. 이것은 변기를 내놓고 작품이라고 했던 마르셀 뒤샹이 던졌던 유명한 질문, ‘미술 아닌 미술 작업은 없을까’를 연상시킨다.

백현진의 회화는 무작위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또 의도적으로 조합되거나 배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화폭 속의 이미지들은 서로 연결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작품은 상하좌우도 없다. 맥락이 닿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이어지며 시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그는 논리를 배제하고 직관적으로 그린다. 그럼 작품이 완성된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몸으로 느껴요.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데 몸이 편해지면 끝나 가는가 보다 싶어요. 몸이 불편하면 더 그려야겠구나 싶고요. 다 끝내고 한쪽 구석에 뒀는데, 6개월 뒤 다시 봤을 때 몸이 불편하면 또 그리기도 해요.”

마치 주술사 같은 고백이다. 이번 전시 제목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은 그런 작품 세계를 표상한다. 그는 막바지 작업을 할 때 어떤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보였다고 했다. 흙바닥에 버려진 매트리스다. 그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흙과 매트리스라는 엉뚱한 조합을 더 엉뚱하게 하기 위해서 물결을 가져왔다. 단지 물결을 좋아한다는 이유에서다.

노동요는 전시할 작품 65점을 최종적으로 골라놓고 제목을 정하는 마지막 순간에 번쩍 떠오른 단어다. 자신의 작업을 감싸는 ‘보자기 같은 단어’라고 했다. 노동요는 농부와 어부들이 고된 노동을 잊기 위해 집단적으로 부르는 민요다. 그러나 백현진의 노동요는 혼술하듯, 혼밥하듯, 혼자 부르는 노래다. “작업하면서 엄청 흥얼흥얼해요. 친구들이 제발 좀 닥치라고 할 정도로요.”

혼자 부르는 노동요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지탱해가는 자신만의 방식이다. 혼자 작업하며 불렀을 법한 노래를 가지고 이번 전시 중에 퍼포먼스도 했다. 직접 작사·작곡한 ‘뮤지컬: 영원한 봄’을 웅얼웅얼 부르며 전시장 2층의 벽면에 봄을 부르듯 초록색을 칠했다.

“멈칫거리며 기웃거리는 영원한 봄, 어, 어, 어워∼어워∼”

1인 3역을 하며 사는 그에게 정체성이 뭐냐고 물었다.

“20년 넘게 병행해온 일이다. 미술가와 음악가가 시간을 많이 사용하는 삶이고 직업이다. 배우는 가끔 하는 일이다. 그래서 단역만 한다”고 했다.

그래도 하나 하기도 벅찬 세상에 둘 다 하는 삶이 지속적으로 가능할까. 그가 말했다.

“미술가들이 말로 떠들고 다니는데 그거야말로 ‘웃기시시네’(설치 작품 이름)입니다. 말이 아니라 작업을 가지고 하는 것이 미술입니다.” 전시는 3월 31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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