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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홀릭이 칭찬? 워라밸 시대엔 ‘부적응자’ 낙인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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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김모(41) 과장은 사내 대표적인 ‘워커홀릭’(일중독자)이다. 주 52시간제가 도입되기 전까지 그는 웬만해선 밤 9시 전에 퇴근하는 법이 없었다. 저녁 6시 반쯤 되면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나갔다가 밥을 먹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그는 마치 부메랑 같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는 온종일 사무실에 앉아 뚝딱거리며 일하고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하러 갈 때만 일어나다시피 했다. 할 일이 있다며 식사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 일할 땐 몇 분씩이나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동료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팀 프로젝트가 끝나 모두가 한시름 돌리는 때에도 등이 굽은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며 뭐라도 했다. 김 과장은 무슨 사내 1인 벤처기업처럼 스스로 일을 만들어 하는 쪽이었다. 정 일이 없을 땐 책상 한구석에 쌓인 서류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다가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료에게 맡기고 쉬어도 될 법한 일들을 도맡았고 틈틈이 휴가를 가기는커녕 주말에도 출근카드를 찍는 일이 빈번했다. 가족도 친구도 취미도 없는 사람처럼 사는 그는 신입직원들에게 ‘저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은 선배 1위다. 김 과장은 요즘 이렇게 투덜댄다. “아니 이놈의 정부는 일하겠다는 사람을 왜 강제로 막아? 집에 가봤자 내가 할 일도 없고 와이프나 애들하고도 서먹한데 그냥 사무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놔두면 안 되느냔 말이야.” 후배들은 그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시대의 부적응자’로 부르고 있다.

쾌감과 금단증상 사이

일중독은 스스로 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에 집착하는 상태를 말한다. 일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일중독자는 강박적으로 일하면서 삶의 다른 부분은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조직이 요구하는 것보다 과도하게 일에 몰입하며 일을 만들어서라도 하는 태도가 일반적이다. 일에 몰두하며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 이들은 일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심리학과 나양수씨는 석사학위논문 ‘일중독, 완벽주의, 일-가정 갈등 및 의사소통이 결혼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에서 “사회 변화나 경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개인적인 삶이나 욕구는 제치고 일만 우선시하는 태도는 과잉적응증후군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대학원 아동가족학과 엄세원씨는 석사학위논문 ‘한국 근로자의 일중독: 고용불안정성과 가족관계만족도와의 관계’에서 일중독자들이 일에 대한 과도한 몰입으로 일과 삶의 불균형을 경험하고, 일을 하지 않을 땐 죄책감이나 불안 같은 심리적 금단증상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일중독은 열의를 가지고 자기 일에 열중하는 직무몰입과는 다르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에 몰두하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은 닮았지만 강박 여부, 일하지 않는 때의 심리 상태 등에 차이가 있다. 전문가들은 일중독을 치료의 대상으로 본다. 미국 심리학자 웨인 오우츠는 1971년 저서에서 ‘일중독(workaholism)’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며 ‘끊임없이 일하려는 내적 충동과 지나치게 일에 집착하는 습성으로 건강, 대인관계, 행복감, 사회인으로서의 정상적 기능에 장애와 마찰을 유발하는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탓에 일중독은 칭찬이나 자부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엄세원씨는 “한국에서는 일중독자가 되는 게 회사뿐 아니라 가정에도 헌신하는 걸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있다”며 “일중독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장려하기 때문에 일중독에 대한 문제의식이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강남을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최삼욱 교수는 저서 ‘행위중독’에서 일중독을 이 시대에 가장 미화되고 최고로 보상받는 중독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나양수씨는 “(일중독자는) 자신의 행동이 지극히 상식·모범임을 주변을 통해서 확인받기 때문에 일중독을 인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부심을 갖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저녁 있는 삶’이 불편한 일중독자들

일중독은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건강은 물론 일이나 인간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자기 자신과 가족을 비롯해 주변인에게 소홀하게 만들고 생활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는 점을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직무몰입은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반면 일중독은 일과 삶의 균형에 무감각하는 점에서 다르다. 일중독자는 프리랜서나 자영업자처럼 일과 개인생활을 거의 구분하지 않아 ‘일이 곧 삶’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들은 주52시간 시행과 함께 강조되는 ‘저녁이 있는 삶’을 불편해하며 새로운 근로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게 직장인들의 공통 증언 중 하나다. 중견기업 대리급 회사원 김모(30)씨는 “‘하드 워커(hard worker)’로 평가받던 사람들은 저녁 6시 퇴근을 불편해한다”며 “그들에게선 어떤 죄책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고 말했다.

일중독자는 일을 하면서도 조급함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과물이 성에 차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일을 맡기는 것을 어려워하는 모습도 관찰된다. 스스로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기질이 강한 탓이다. 이들은 팀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동료와 업무를 적절히 나누기보다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도맡아 하려 드는 성향을 보인다. 의사소통에 미숙해 동료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들 특성은 조직 면에서 조화롭고 효율적인 업무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중독자 개인으로서는 정서적 지지를 받을 만한 동료 관계를 형성하지 못해 스트레스 상황에서 더욱 일중독에 빠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일중독이 건강을 악화시키고 직무 관련 사고와 질병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광운대 대학원 산업심리학과 정병석씨는 석사논문에서 일중독자가 조직 내에서 일으킬 수 있는 문제들을 나열하며 “일중독 성향이 높은 사람들을 관리하지 못한다면 조직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중독자에게 일에 대한 몰두와 애사심은 거의 별개다. 벨기에 블레릭비즈니스스쿨 명예교수 마크 뷰렌스 박사와 앤트워프경영대 스티브 폴맨스 교수가 2004년 정규직 근로자 585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일중독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소속 조직을 개인 성장을 촉진하는 곳으로 보기보다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가진 곳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씨는 “이러한 (연구) 결과는 현 직장을 부정적으로 인식함에도 다른 직장으로 옮기지 못하는 상황을 말해준다”며 “이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직무에 대한 몰입은 외적 강요에 의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일중독은 선택일까?

엄세원씨는 기존 연구들을 정리해 일중독 요인을 개인적·거시적·가정적 측면으로 구분했다. 일중독 성향을 보이게 되는 개인의 심리 특성으로는 완벽주의 성향이나 강박, 신경증, 어린 시절 형성된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 등이 거론된다. 거시 측면에서는 성과주의와 보상 중심 경영시스템, 경쟁적 조직 분위기, 불안정한 고용구조, 집단주의 같은 노동 환경이 일중독 배경으로 지목된다. PC·스마트폰 등 IT기술 발달이 일중독을 촉진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은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성취를 강조하고 그에 대한 보상과 인정이 주어지는 탓에 일중독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일부 연구는 경쟁 문화 내에서 특정 개인의 일중독 성향이 높아질 경우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일중독 성향도 높아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고 정병석씨는 전했다.

불안정한 고용 구조는 여러 전문가가 지적하는 주요 일중독 환경이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처럼 경제적 충격을 겪으며 실직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일중독이 심해질 수 있다. 김왕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2007년 한국사회학회지에 실은 논문에서 일중독 유형을 노동강제형·과도성취형·과부하형·완벽추구형 등 4가지로 구분하고 고용불안정에 대한 인식이 노동강제형을 제외한 나머지 세 유형의 일중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확인했다. 장시간 근로 환경도 일중독에 빠지기 쉬운 배경으로 지목된다. 윤자영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해 학술지 ‘산업노동연구’에 게재한 일중독 실태 연구에서 “자기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일중독과 그로 인한 다양한 폐해를 막기 위해 우리나라 취업자의 17.9%에 해당하는 60시간 이상의 과도한 노동을 실질적으로 단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장 환경도 일중독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동·청소년기에 부모와의 애정 경험이 부족한 경우, 부모가 성취를 강조하며 지나친 기대를 거는 경우, 성취에 따른 보상을 양육 원칙으로 삼는 경우, 부모 간 다툼을 비롯한 가정불화가 잦은 경우 등은 향후 자녀의 일중독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리 아빤 훌륭한 사람인가요?”

그동안 연구자들은 일중독 개념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삶을 파괴하는 질병으로서의 일중독에 초점을 맞췄다. 전문가들은 일중독이 ‘가족의 질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족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일중독자는 일을 위해 가정을 희생하기도 하는 만큼 가족이 소외감을 경험하기 쉽다. 일중독자의 배우자는 높은 우울감,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기분 따위를 느끼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나양수씨는 “배우자들은 홀로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을 꾸려나감으로서 분노감과 불편감이 (증폭)되고 외로울 수 있다”며 “다른 방향으로 몰두할 거리를 찾을 수 있지만 대체된 여러 활동이 자신의 깊은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분노·우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중독자의 자녀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가 부모의 일중독 성향을 물려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해외 연구들에서 일중독자는 낮은 가족관계 만족도, 가정생활에 대한 실패감, 일과 가정 사이에서의 갈등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의 맞벌이 부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일중독 성향이 강한 경우 가족생활에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부부관계 만족도 또한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엄씨는 전했다. 주목할 점은 가정문제가 일중독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다. 엄씨는 일중독이 가족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부정적 가족관계로 인해 일중독에 빠지거나 일중독 수준이 높아지기도 함을 지적했다. 가족관계에 불만족을 느끼는 이들이 회피의 한 방법으로 일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경우가 그런 사례다. 한 가정상담전문가는 “집이 불편해 회사에 더 오래 머물고, 가정불화로 인해 일에 더 몰두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 경우 일중독은 가족관계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악순환하게 된다”고 말했다. 나씨는 “일중독 특성으로 부부의 개인적 삶이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감하는 등 질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결혼만족도를 유의하게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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