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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미니즘’ 딸바보 아빠들의 페미니스트 도전기

‘성미산 아빠페미’ 회원들이 지난 18일 마을회관 카페에서 요리 기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가정에서 그동안 엄마의 일로 여겨온 집안일을 도맡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특히 김장담그기 행사 등을 주기적으로 열어 아빠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마을 주민에게 나눠주고 있다. 윤성호 기자


‘성미산 아빠페미’ 회원들이 지난 18일 마을회관에 모여 ‘여성혐오’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빠미니즘’. 아빠의 페미니즘이라는 뜻이다. 자식들이 성별을 떠나 독립된 개체로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아빠의 페미니즘은 자연스러운 현상 아닌가. 특히 딸이 있는 아빠라면. 하지만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대한민국 평균 아빠들에게 페미니즘은 충격이자 고뇌였다.

‘성미산 아빠페미’ 회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아빠들로 구성된 유일한 페미니즘 공부모임이다. 이들은 인터뷰 요청에 “페미니즘을 공부한 지 얼마 안 돼 아는 것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설득해 지난 18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회관에서 간신히 만남이 성사됐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페미니즘 모임 회원들다운 ‘오해’도 있었다. 인증샷을 찍는 아빠들을 위해 기자가 몸을 살짝 피했더니 한 회원이 “허락 없이 사진 찍는 것은 불법”이라며 기자를 안심시켰다. 사진이 찍힐까봐 걱정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페미니즘을 모른다더니 ‘불법 촬영’에 민감한 요즘 감성이었다.

이들은 어쩌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을까. 2017년 9월 성미산마을의 대표 행사인 가을운동회에서 생긴 사건이 출발이었다. 사회자가 행사를 진행하다 “왕자님(아빠들)이 성 안에 갇힌 공주님(엄마들)을 구해오라”고 말했는데 이후 ‘성 역할 고정관념 발언이 불편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평가서에 적힌 그 한 줄이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행해 왔던 말과 생각 모두를 흔들었다. 부끄러웠고, 궁금했다. 대체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그때 문제의 발언을 했던 사회자가 바로 ‘아빠페미’를 만든 이종훈(53)씨다. 그는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만큼 성역할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며 “그런 말을 내가 거리낌 없이 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무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른 회원은 “페미니즘에 반감을 갖는 아빠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아 참여하게 됐다. 가정 내 성평등을 이루고 싶어 일단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불평등한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최후의 가부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또 다른 회원이 “난 오히려 내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알면 알수록 움츠러들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줬을지 걱정됐다”고 털어놨다.

가을운동회 사건 이후 이씨는 성미산학교 교사의 권유로 지난해 2월 ‘아빠페미’를 결성했다. 매주 만나는 공부모임이었다. 이들은 여성학자를 초청해 ‘여성혐오’ ‘10대의 성(性)’ 등을 주제로 강의를 듣고, 연구모임 도란스의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같은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여성인권영화제에도 함께 참석했다.

‘아빠페미’의 지난 1년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단어는 ‘충격’이다. 회원들은 입을 모아 ‘가장 충격적인 성차별 단어’로 ‘예쁘다’를 꼽았다. 한 회원은 “여성을 칭찬할 때 ‘예쁘다’고 한다. 나 역시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공부를 시작한 후 의미를 들여다보니 여성을 오직 외모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이들이 마련한 ‘성평등한 마을을 위한 10가지 약속’ 중 하나는 “‘예쁘다, 살빠졌다’ 대신 참신한 인사법을 고민해 주세요”였다.

일상 속에 녹아 있는 2차 가해도 놀라웠다. 한 회원은 “네가 조심했어야지, 여지를 줬겠지,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지, 야한 옷을 입지 말았어야지, 먼저 유혹했겠지 같은 말들이 일상에 뿌리내려 있었다는 걸 토론을 하다 느끼게 됐다. 나조차 그런 말을 쉽게 했다”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겠다는 걸 이해했다”고 말했다.

‘여성혐오’에 대한 토론 역시 이들에게 큰 변화를 안겼다. 아빠들은 처음 이 말이 문자 그대로 ‘여성을 혐오한다’는 뜻인 줄 알았다. 배우고 나니 달라졌다. 여성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 이를 테면 ‘조신하고 정숙하고 순종적인 여성’이란 생각 자체가 남성의 시선에서 빚어진 여성혐오 단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빠들의 변화를 가장 반긴 건 가족들이었다. 한 회원은 “내가 집안일 하는 모습을 보고 딸이 아빠 최고라고 하더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또 다른 회원은 “딸이라고 꼭 분홍색 옷을 입혀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를 아내와 나눴다”며 “딸이 ‘농부 아저씨가 씨앗을 뿌렸다’는 말을 하기에 농부가 꼭 아저씨여야 하는 건 아니다’고 정정해준 적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각성하는 사람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 사이 갈등도 많았다. 중년 남성이 평생 지녀온 생각을 바꾸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무지’를 깨닫는 1차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2단계에서는 이탈자가 속출했다. “이런 불편함이 싫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한 끝에 현재 모임은 회원 수 1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한 회원은 “대개 아빠들은 페미니즘 논란에 끼고 싶지 않아 한다. 과거 방식이 익숙하니 굳이 배우고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이제 페미니즘 공부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했다. 성미산학교 교사는 “수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나 혼자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이제 ‘아빠페미’와 함께 하나하나 답해가려 한다”고 말했다.

요즘 이들은 ‘아빠’라는 말이 주는 위계감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가부장제에서 아빠라는 단어가 풍기는 권위의식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딸을 둔 아빠들은 ‘딸 바보’가 아닌 ‘아빠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말도 했다. ‘딸을 위해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이지 ‘딸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 회원은 “딸 바보는 딸을 지켜주고 싶은 아빠지만 아빠 페미니스트는 딸과 동등한 입장이 되려는 아빠”라며 “딸도 혼자서 제 역할을 하고 사회에 나가 당당하게 설 수 있다. 그 과정을 존중해 주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아울러 성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자식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아빠가 협심해야 한다는데 생각을 모으고 있었다. 한발 더 나아가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 강력히 동의했다. 이런 이유들로 ‘아빠’가 들어간 모임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도 나왔다. 첫 번째 개선책으로 올해부터는 아빠에서 모든 남성으로 모임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아빠 페미니스트에게 지난 1년은 충격이었고, 고뇌였으며, 성찰이었고, 생존이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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