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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호미 손에 연필 그러쥐면 시골 할매들 고단한 삶은 詩가 된다

김선자 길작은도서관장
 
영화 ‘시인할매’는 평생을 까막눈으로 산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면서, 서툴지만 아름다운 시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마을 도서관에서 시 숙제를 하는 할머니들 모습. 스톰픽쳐스코리아 제공


“전쟁과 가난, 가부장적 문화로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은 ‘너는 글도 모르는 것이 사납긴 엄청 사납다. 학교도 안 다니는 게….’라는 말을 들었다며 평생 한이 된다고 하셨어요. 시장에 가면 글을 아는 마을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젠 간판 보고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며 좋아하셨죠. 가슴에 묻어둔 것을 시로 표현하며 스스로 위로하시는 모습에 저도 참 기뻤어요.”

삶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할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는 김선자(49) 길작은도서관 관장이 지난 1일 국민일보 전화 인터뷰를 통해 한 말이다. 김 관장은 전남 곡성 입면제일교회 사모이다. 2004년 남편을 따라 교회에 온 뒤 조손 및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을 개관했다. 2009년 우연한 계기로 할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됐다.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할머니 몇 분이 도와주셨죠. 책이 거꾸로 꽂혀 있어서 바로 꽂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책을 뒤집어서 꽂으시더라고요. 글을 모르시는 것 같아 그분들을 모시고 한글 수업을 시작했어요.”

어릴 적 할머니 집에서 유난히 좋아했던 살구나무의 이름을 따 ‘살구나무 학습반’을 만들었다. 12명의 할머니들이 참여했다. 도서관에서 가르치다 보니 체계적인 학습 과정과 교재의 필요성을 느꼈다. 전남 곡성군 문예교사 양성과정을 이수해 군의 지원을 받아 ‘금산2구 학습반’을 열었다. 2013년부턴 ‘살구나무 학습반’과 ‘금산2구 학습반’을 통합해 8명의 할머니와 교제하며 수업하고 있다.

“한 번도 글을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는 수업 과정 자체가 어려웠어요. 평생 호미를 쥐셨지만, 연필은 잘 못 쥐시더라고요. 하루 분량도 벅찼죠. 한두 달 자녀들 집에 갔다 오면 다 잊어버리셨고요. 할머니들에게 책 한 권 끝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재미있게 수준에 맞춰서 공부하기로 했죠.”

도서관에 있는 동시와 동요집, 그림책 등으로 재미있게 수업하려고 했다. 10년 이상 수업했지만, 할머니들은 아직도 띄어쓰기, 맞춤법을 많이 틀린다. 김 관장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니 이에 관해 부담 갖지 말라고 끊임없이 격려한다.

오랫동안 시를 좋아한 김 관장은 2010년부터 시 수업도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일상 가운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시집살이와 가난을 주제로 한 시들이 많았다. 김 관장은 할머니의 삶이 잊혀지는 게 아쉬워 124편을 모아 2016년 시집 ‘시집살이 詩집살이’를 출간했다. 할머니들은 평생 남들이 흉볼까 봐 가슴앓이한 것을 표현하며 치유를 경험했다. 그동안 자신의 삶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나 잘 견뎠다고 스스로 위로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스토리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시인 할매’(감독 이종은)는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았던 할머니들이 작은 마을 도서관에 모여 한글을 배우면서, 서툴지만 아름다운 시를 써 내려 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가 입소문을 타면서 도서관을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며 김 관장은 웃었다. “그냥 도서관이 아닌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도서관이 되길 기도합니다. 도서관 지붕이 낡고 담벼락이 기울어졌는데 올해는 이 과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마을 분들과 호흡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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