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사  >  종합

헌정사 초유 前 대법원장 양승태 구속… 사법부 ‘치욕의 날’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를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서고 있다. 영장실질심사는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서울중앙지법 321호 법정에서 진행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심사가 끝난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해 밤늦게까지 결과를 기다렸다. 권현구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4일 새벽 구속 수감됐다. 법원이 ‘사법농단’ 의혹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 영장을 발부함에 따라 7개월간 달려온 검찰 수사는 빠르게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법원은 ‘제 식구 챙기기’라는 비판 여론은 피하게 됐지만, 법원 스스로 전직 수장을 구속하며 사법부 차원의 ‘사법농단’을 사실상 인정함에 따라 또다른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3일 5시간30분에 걸친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이날 오전 2시쯤 “범죄사실 중 상당부분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다”며 구속을 결정했다. 명 부장판사는 이어 “현재까지의 수사진행 경과와 피의자의 지위 및 중요 관련자들과의 관계 등에 비추어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10시간 가량 영장 결과를 기다리던 양 전 대법원장은 그대로 독방에 수감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 및 법관 인사 불이익 등 일련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서 직접 개입하고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한 혐의는 40여개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사건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법관들에게 인사불이익을 준 혐의(직권남용 등)가 대표적이다.

반면 지난해 12월 한 차례 구속 위기를 벗어났던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은 이날 두 번 째 영장실질심사에서도 구속을 면하며 양 전 대법원장과 운명이 엇갈렸다. 박 전 대법관에 대한 심사를 진행한 허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종전 영장청구 기각 후의 수사내용까지 고려하더라도 주요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허 부장판사는 검찰이 영장을 재청구하며 추가한 혐의에 대해서도 “추가된 피의사실 일부는 범죄 성립 여부에 의문이 있으며, 수사경과 등에 비추어 구속의 사유 및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영장이 발부된 것은 법원이 사법농단 의혹의 최종 책임자로서 그의 범죄사실을 상당 부분 인정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검찰은 심사에서 ‘강제징용 소송’ 등 박근혜정부와의 재판거래에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를 여럿 제시했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과 세 차례 ‘독대’를 했다는 법무법인 김앤장 한상호 변호사의 진술과 김앤장에서 작성한 관련 문건을 내놨다. 김앤장은 강제징용 소송의 피고인 일제 전범 기업을 변호하고 있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징용 소송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회부 등 재판 정보를 독대 자리에서 누설한 혐의(공무상 비밀누설)를 받았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정황을 드러낸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실장의 업무수첩 등도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 측은 이날 심사에서 서지현 검사에게 부당하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직권남용)로 징역 2년의 실형이 선고돼 법정 구속된 안태근 전 검사장 사례도 언급했다. 이와 비교할 때 수십명의 법관에 대해 인사 불이익을 준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가 더 중대하다는 지적이었다.

사법농단 사태의 ‘실행자’격인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10월 구속된 데 이어 ‘최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까지 구속되면서 검찰 수사는 막바지로 향할 전망이다. 설 연휴 등을 감안할 때 검찰은 이르면 이달 말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을 재판에 넘길 것으로 보인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검찰 수사 단계에서 최장 구속기간이 20일이다.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된 초유의 사태에 법원은 침통함을 금치 못했다. 한 부장판사는 “할 말이 없다”며 “판사들의 의기소침한 모습도 안타깝고, 항의하시는 국민들의 모습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그간 언론에 보도된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한 행위는 당연히 고쳐지고 시정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법원장 지위에 있던 분이 구속된다는 건 판사 입장에서뿐 아니라 국민 입장에서도 슬픈 일”이라고 했다.

조민영 문동성 이가현 기자 mymi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