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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아침에 남남이라니… 우리, 정말 아픈 만큼 성숙해질까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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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끝에 이별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연애의 끝이 결혼 아니면 이별인 게 상례다. 언젠가 사적인 모임에서 누군가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얘기하다 “같은 사람이라도 스무 살에 만나면 헤어지고 서른 넘어 만나면 결혼하는 거지”라는 말이 나온 적이 있다. 냉소적이기도 한 저 말은 대체로 옳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별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사랑은 거의 없지만(‘사랑’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러브스토리가 영속보다는 이별로 완결되고 만다.

큰 지진 후에 쓰나미(지진해일)가 몰아치듯 이별 후에는 필연적으로 정서적·심리적 타격이 뒤따른다. 이별을 통보하는 입장이냐, 통보받는 입장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슬픔 분노 증오 공허감 우울 같은 부정적 정서를 복잡하게 경험하는 게 일반적이다. 일상에 큰 지장을 주는 이런 상태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면 자신감과 자존감 저하, 삶에 대한 전반적 의욕 상실, 타인에 대한 불신 고조, 대인 기피와 사회적 고립 같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들 하지만 이별이라는 고통을 겪었다고 모두가 저절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별과 트라우마

이성교제가 활발해지는 10대 후반은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이별을 겪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연애를 시작한 이들에게 상대는 자신에게 누구보다 중요한 대상인 만큼 이별의 충격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대학생 상담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제가 이성관계에서 겪는 갈등이라는 사실은 이 시기 젊은이들에게 이별이 가져다줄 상처의 깊이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경남대 가정교육학과 김진희 교수는 한국가정관리학회지 게재 논문에서 대학생 상담 사례를 보면 내담자 70%가 이성관계에 대한 문제를 가져온다고 전한 바 있다. 가톨릭대 대학원 상담심리학 전공 신선영씨가 석사학위 논문 과제로 20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외상사건 유형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분석 대상 363명 중 가장 많은 53명(14.6%)이 이별 실연 절교 등 대인관계 파탄을 꼽았다. 또 다른 유형의 이별이라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이 다음으로 많은 51명(14.1%)을 차지했다.

이별은 신체적·정서적·심리적으로 다양한 반응을 일으킨다. 흔히 식욕이 줄고 불면 증세를 경험하면서 피로감이 커지고 무기력해진다. 심한 경우에는 두통 같은 신체적 통증을 호소한다. 주체할 수 없이 아무 때나 눈물이 터져 나온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자꾸 상대나 그와의 추억이 떠오르고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며 후회하는 모습도 일반적이다. 갑작스러운 이별로 배신감을 느끼며 연애 상대와 같은 이성을 불신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정서적으로는 슬픔·우울과 함께 분노 미움 배신감 같은 공격적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관계를 망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미안해하며 떠나간 이성을 그리워한다. 이별에 몰입할수록 일상은 엉망이 된다. 학업이나 취업 준비 등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채 상황을 되돌리기 위한 노력에 ‘올인’하고, 고통이나 회한을 잊기 위해 바쁘게 지내려 애쓰기도 한다. 과음 등으로 해소하는 모습도 드물지 않다. 상대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구속적이었던 경우에는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한다.

연인과의 이별은 대개 강한 스트레스를 주고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한 상담 전문가는 “이별의 아픔이 지속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발전하기도 한다”며 “이별 경험은 주요 우울장애 초기 진단에 대한 미래의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실연을 경험한 대학생을 대상으로 PTSD 증상을 측정한 결과 72%가 고수준 집단에 해당했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이별한 이들은 자기비난적으로 사고하게 되면서 정서적 문제를 경험할 수 있다”며 “이별 경험은 정체감을 형성해가는 청소년이나 청년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 친밀한 이성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하는 경우 상처 입기를 두려워해 타인과 관계 맺기를 꺼리게 되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고립될 위험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이별 경험이 반드시 심각한 외상이 되는 건 아니다.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고 자신에 대한 인식, 대인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하는 기회가 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사람들은 다른 스트레스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별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주변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친한 지인에게는 지지와 위로를 요청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게임이나 영화 등에 몰두하거나 운동·여행 같은 활동으로 기분전환을 시도하기도 한다.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봉사나 대외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아르바이트, 어학연수, 자격증 공부 등으로 출구를 만들기도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이 사람과는 어차피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 ‘좁혀지지 않는 차이가 있었으니 서로한테 잘된 일이야’라는 식으로 이별을 긍정하려 하기도 한다. 평안을 얻기 위해 신앙에 의지하는 이들도 있다. 이별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단점이나 관계의 부정적 측면에 집중하는 유형도 있다.

이모(28·여)씨의 경우를 들어보자. “대학생 때 처음으로 제대로 사귀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한참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죠. 살이 너무 빠져서 눈이 퀭해 보이니까 주변에서 다들 걱정하는데 저는 거의 그 사람 생각만 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했는데 길을 걷다가, 영화를 보다가, 수업을 듣다가 눈물이 쏟아진 적도 여러 번이었구요. 다 내가 잘못한 것만 같고, 그러다 보니까 저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자존감도 떨어졌습니다. 그때 가장 힘이 된 건 주변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 힘드니까 누구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 싶었는데 그 과정에서 친구들이 공감해주고 위로해준 덕에, 시간은 좀 필요했지만 서서히 회복해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별로 힘든 시기를 잘 넘긴 이들은 자신을 반성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들에게 이별 경험과 극복 과정은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단점을 개선하는 기회가 된다. 이성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걷어내고 연애 상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 부정적 사건에 대한 내성이 강해지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요령을 익히게 된다. 김모(30)씨는 “과거 여러 번의 이별을 겪으면서 그때는 너무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좀 더 애쓰게 됐다”며 “이별의 아픔을 잊어보려고 동아리나 취미활동 같은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운동이나 여행 같은 새로운 시도도 해봤는데 그런 것들이 내 20대 시절을 풍요롭게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저절로 성장하는 사람은 없다

이별 트라우마를 잘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이성교제를 비롯해 새로운 만남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고 사실상의 고립에 처하는 탓에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관계가 약해진다. 우울과 분노 등 부정적 정서가 장기화하면서 무기력한 일상이 반복되고 술 등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박모(32)씨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대 후반까지 이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새로운 만남을 꺼리게 됐죠. 내 얘기를 남들에게 잘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았는데 내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장난을 걸기라도 하면 인상을 쓰거나 버럭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사람들한테 더 불편한 사람이 되고 나는 더 고립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구요. 나중에는 안 되겠다 싶어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한두 사람한테 나의 힘든 상황을 털어놓고부터 비로소 지지받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별이라는 외상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이고 자기감정을 적절히 표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상황을 돌이키려고 무작정 애쓰기보다 새로운 목표를 좇는 방법은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아주대 교육대학원 심리치료교육 전공 성부해씨의 연구에서 이별경험 후 대안적 목표 추구는 외상 후 자기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씨는 “후회반추를 덜하고 대안적 목표 추구 전략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후회 관련 정서를 감소시키고 주관적 안녕감을 향상시킨다”고 설명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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