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지금, 미술] “소쿠리·대야… 플라스틱 제품서 아줌마의 창의성과 모성을 느꼈죠”

지난 9일 시민들이 서울 강남구 스타필드 코엑스몰 입구에 설치된 최정화 작가의 작품 ‘꿈나무’ 주위를 걷고 있다. 권현구 기자
 
성북구 성북동에 설치된 ‘숲’(2018년 작). 두 작품 모두 플라스틱 제품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공공미술의 장으로 나온 자신의 작품에 대해 “누군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면 그게 작품의 또 다른 완성”이라고 말했다. 작가 제공
 
최정화 작가


“와, 이건 포도야. 냠냠, 냠냠.”

무 바나나 사과 옥수수…. 온갖 과일과 채소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렸다. 동화 나라에 온 기분이라도 들어서일까. 소꿉놀이에 쓰던 플라스틱 모형을 뻥튀기한 것 같은 작품이라 친근해서일까. 꼬마 숙녀 둘이 최정화(58·사진) 작가의 작품 ‘꿈나무’(2005년 작)를 둘러싼 둥근 벤치에 무람없이 올라가더니 포도를 먹는 시늉을 한다.

지난 9일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과 스타필드 코엑스몰 연결통로. 겨울인데 털모자도 쓰지 않은 채 빡빡머리로 나타난 최 작가가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이 작품은 지난해 5월 코엑스몰 별마당 도서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설치됐는데, 두 달 전 이곳 야외 ‘반지하 광장’으로 옮겨져 셀카 명소가 됐다.

최정화는 소위 ‘넝마주이’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1987년 이후 회화는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일상에서 소비되는 흔하고 저렴한 소재 혹은 버려진 소모품을 활용해 설치작품을 했다. 냄비 그릇 소쿠리 밥상 빨래판 문짝…. 버려진 것들을 줍거나 얻었다. 때론 사기도 한다. 쓰지 않는 식기와 냄비가 꽃으로 피어나고, 플라스틱 바구니는 높이 쌓아 올려져 짝퉁 코린트식 기둥이 되기도 한다. 나무와 천 등 여러 헌것들을 쓰지만, 가장 강력한 건 ‘플라스틱 소쿠리’다. 90년 그룹전 ‘썬데이 서울’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플라스틱은 그의 정체성이 됐다.

어떡하다 플라스틱에 꽂혔냐고 물었더니 ‘아줌마 찬양론’이 튀어나온다.

“근엄한 예술이 싫었던 때였어요. 어느 날 플라스틱 제품들이 눈에 번쩍 뜨이더군요. 시장과 골목, 집안 어디를 가도 그게 굴러다니잖아요. 파격과 폭발하는 에너지가 거기 있었어요.”

소쿠리 빗자루 화분 대야 등 플라스틱으로 만든 온갖 사물에서 여성들의 창의성과 생존력, 모성을 느꼈다고 한다. 소쿠리에 과일을 담아 파는 시장 아줌마, 고무 대야가 없으면 욕조에 김치를 담는 전업주부…. 아카데미즘이 할 수 없는 아줌마들의 실험정신을 칭찬하는 그는 “살림이 곧 창작성”이라고 했다.

작가 최정화와 그가 택한 소재인 플라스틱은 모두 90년대라는 시대의 산물이다. 미술평론가 이영철의 평가대로 한국 미술의 대세였던 모더니즘(단색화)과 민중미술이 격돌하던 즈음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습격하듯 등장했다. 그 중심에 최정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마디로 예술과 일상,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 허물기를 특징으로 한다. 일상의 물건을 가지고 예술을 하는 그의 작품 세계는 종종 팝아트로 해석이 된다. 하지만 최정화의 작품이 갖는 힘은 플라스틱이라는 싸구려 소재가 갖는 여성성, 그리고 계급성에 있다고 본다. 너무 싸서 주변에 넘쳐나는 플라스틱 제품들은 주로 아줌마들이 사용하는 물건이었고, 동시에 가난한 서민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으로 만든 미술 작품은 난해하지 않다. 소쿠리를 포개서 쌓아올린 기둥, 밥상을 쌓아올려 만든 피라미드, 식기를 줄줄이 쌓아 만든 꽃을 보고 누가 주눅이 들겠는가. 어떤 작품은 칠을 해 더욱 번들거리게 만든다. 90년대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제비족으로 분한 한석규처럼 서민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꽃, 숲’전(2월 10일까지)에서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미국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실크 스크린이 미디어 시대 이미지의 복제를 은유한 것이라면, 최정화의 작품은 이발소 그림의 설치미술 버전처럼 친근하다. 엘리트가 아닌 대중에게 ‘나도 미술을 이해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미술이다. 그래서 최정화의 작품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민중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스틱은 박정희 시대 개발경제의 산물이다. 59년의 한 신문에 따르면 20세기의 총아로 떠오른 플라스틱 공업은 국가적 과제로 자리매김한다. 플라스틱이 대변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경제는 95년에 10조원 내수시장으로 성장하며 정점에 이르렀다. 서울의 난지도 매립지에 쌓여가던 쓰레기 산이 입증했다. 작가는 “난지도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지표였다. 난지도에서 역설적으로 잘살고 싶어하는 욕망 덩어리로서의 서민의 민낯을 봤다”고 했다.

대량소비시대 서민들이 애용했던 각종 플라스틱 제품은 이제 21세기 들어 공포의 대상으로 변질됐다. 숨진 고래의 뱃속에서 나온 6㎏에 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충격적이다. 이는 우리에게 플라스틱에 대한 이미지 수정을 요구한다. 저급한 싸구려, 서민이라는 계급적 이미지가 과거에 있었다면 이제는 계급을 초월해 환경적 재앙을 불러오는 괴물의 이미지로 커가고 있다.

작가는 쓰레기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를 지적한다. 진작 플라스틱을 귀하게 여겼더라면 이런 복수를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하면 꼰대가 된다. 그가 플라스틱 작품을 처음 선보인 이후 29년이 흘렀다. 세상은 변한다. 그의 언어도 변할까.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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