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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클러 없이 소화기만 달랑 하나… ‘火’난 통신구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25일 사다리를 이용해 서울 서대문구 KT 아현지사 통신구에 들어가 전날 화재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감식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서영희 기자


16만 유선회로 설치됐지만 연소방지시설 의무 없어
병원·경찰·軍에도 문제, 119 신고 늦은 환자 사망도
“현대사회 유기체처럼 연결, 작은 문제로 붕괴될 수도”


서울 KT 아현지사 통신구(케이블 부설용 지하도) 화재는 한국 사회가 기술 집약적으로 고도화됐지만 재난 안전망은 여전히 뒤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작 150m 미만의 지하도에서 발생한 화재로 서울시민의 일상이 파괴됐지만 제도적으로 이를 관리할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안전장치가 미비할 수밖에 없는 허술한 관리 규정이 대란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발생한 고양 저유소 화재에 이어 또다시 국가 기간시설급 관리에 구멍이 드러난 셈이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 관계자는 2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회가 정밀히 연결돼 있는 유기체처럼 구성돼 작은 불안요소 하나로 댐 전체가 붕괴될 우려도 커졌다”며 “이번 화재는 폭발물을 이용한 테러가 아니더라도 사회가 어이없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실제 서울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로 서대문구와 마포구 등 일대의 통신이 작동을 멈췄고 그 여파로 촌각에 생사가 오가는 119와 병원 및 경찰, 군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5시쯤 서울 마포구에 사는 A씨는 심장에 이상을 느껴 가족에게 알렸지만 통신장애로 제때 119에 신고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얼마 지난 뒤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이 곧바로 출동했지만 A씨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날 신촌 연세세브란스병원에는 통신이 끊겨 전화 예약이 불가능해진 환자들이 직접 방문해 접수하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병원을 찾은 시민들은 국민건강보험 가입 여부를 조회할 수 없어 비보험 진료만 받는 경우도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는 “전날에는 의료진 연락수단인 ‘콜 폰’이 먹통돼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원내 안내방송으로 의사들을 찾았다”고 말했다.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과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역시 통신 장애 탓에 환자들과 소통을 원활히 하지 못했다.

화재 발생 직후 서울 용산경찰서, 남대문경찰서, 서대문경찰서, 마포경찰서의 112통신 시스템 역시 한때 작동을 멈췄다. 서대문·용산·마포서는 상황실 직원을 서울경찰청 상황실로 파견해 관할구역 신고를 직접 무전으로 받는 형식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일선 경찰관들이 사용하는 상황조회 업무용 스마트폰인 ‘폴리폰’도 전날 화재로 인해 7시간가량 작동을 멈췄다.

용산구에 위치한 국방부는 육군본부·공군본부 등 직통 연결망을 제외한 내외부 통신망이 망가졌다. 다만 군 작전에 쓰는 내부 통신망과 정부 부처끼리 주고받는 통신망은 별도로 구성돼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통신구는 화재가 발생하면 이처럼 국가 주요 시스템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만 법적으로는 국가 기간시설에는 속하지 않아 관련 안전 규제를 받지 않는다. 특히 KT 아현지사는 서울 서대문·중구·마포 일대로 연결되는 16만8000유선회로와 광케이블 220뭉치가 설치된 주요 시설이다. 그러나 통신구에는 소화기 1대만 비치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대문소방서 관계자는 “화재가 발생한 지하 통신구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았고 광케이블이 매설된 구역으로는 접근이 어려워 진화에 어려움이 컸다”고 설명했다.

현행 소방법에 따르면 ‘길이가 500m 이상의 지하도’ ‘수도·전기·가스 등이 집중된 공동 지하도’에 스프링클러·화재경보기·소화기 등 연소방지시설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불이 난 통신구는 길이 150m 미만에 통신망과 광케이블 등 통신설비만 설치된 ‘단일통신구’라 연소방지시설 의무설치 대상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사회가 발전한 만큼 기간시설에 대한 규정을 새로 하고 비슷한 규모의 시설에도 반드시 소방설비를 갖추도록 하는 등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통신구는 지하에 있어 화재가 발생해도 감지하기 쉽지 않고 사람이 직접 다가가서 끄기도 어렵다”며 “이번 화재에서 보듯 통신시설 파괴가 야기한 혼란이 큰 만큼 통신구의 길이와 상관없이 이산화탄소 소화설비나 분말 소화설비, 청정소화약제 소화설비 등의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도 “수도·가스·전기가 함께 설치된 공동지하도는 접속지점마다 소화설비를 설치해야 한다”며 “통신구에도 동일한 규제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사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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