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타 역사는 ‘신성일 전후’로 나눠진다

불과 한 달여 전인 지난달 4일,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 선 배우 신성일. 정장 재킷에 청바지를 매치하는 젊은 감각을 뽐낸 그는 연신 밝은 얼굴로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전찬일 영화평론가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은 함부로 해서는 결코 안 될,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죽음 이전에 그 사람의 삶과 전 존재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그 죽음을 기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감히 이 추모사를 쓰는 것은 고인이 내 삶에 끼친 영향력이 워낙 크고 깊어서다. 후배로서 그 거대한 삶과 죽음에 일말의 경의나마 바치고 싶은 소망에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혀 왔지만, 신성일 그는 내 영화 인생의 어떤 ‘절대 존재’였다. 안인숙 윤일봉 백일섭 등과 함께한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이 그 계기였다. 그 기념비적 멜로드라마는 영화라는 오락이자 예술·문화를 ‘치명적 매혹’으로 각인시켜줬고, 훗날 전혀 계획에 없었던 영화평론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는 문제작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신성일이 연기한 화가 ‘문호’는 비련의 여주인공 경아의 남자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한복판에는 ‘스타 연기자’ 신성일이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중년의 문호, 신성일의 이미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로 줄곧 신성일은 한국영화만이 아니라 한국 연예·문화계, 더 나아가 한국사회 전체의 전무후무한 엔터테인먼트 스타로 내 심상에 머물러 있다. 동의 여부에 아랑곳없이, 대한민국의 스타 역사는 ‘신성일 이전’과 ‘신성일 이후’로 나뉜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확신이다.

지난달 26일 열린 세미나 ‘한국영화 99주년, 100년의 문턱에서: 한국영화의 기원, 표상, 비전’에서 발표한 ‘한국영화 100년, 시대의 변천과 남성 인물의 자화상’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남용·오용 등으로 스타의 의미가 무의미해진 이 시대에도, 신성일은 종종 스타덤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곱씹게 하곤 한다고. 스타는 수두룩하지만, ‘이미지’와 ‘기호’로서의 스타, 나아가 ‘문화자본’ ‘사회적 현상’으로서 스타라는 개념에 종합적으로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은 신성일밖에 없다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스타의 속성 중 하나가 그 단명성이라고 할 때, 대한민국 역사에서 신성일에 견줄 스타는 부재해 왔다(는 게 수십년간 유지돼 온 내 주장이다). 내게 스타를 딱 한 명 대라면 나는 언제나, 주저 없이 신성일을 들어 왔다. 신성일과 심심치 않게 비교되는 알랭 들롱이나, ‘스타의 화신’이라 할 제임스 딘이 아니었다.”

고인을 떠나보낸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에 더욱더 와닿는 것은 신성일 그의 청춘성과 생명력이다. 단언컨대 내게 올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의 단 한 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신성일이었다. 환한 미소를 품은 그 당당함과 품위는, 정확히 한 달 후 저세상으로 떠날 폐암 3기 환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결정적 출세작 ‘맨발의 청춘’(1964)에서 연기한 인물 ‘두수’에 직결됐다. 그는 두수로부터 50여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청년이었던 것이다. 500편이 넘는 다작의 와중에도 반영웅적 캐릭터들을 자기만의 이미지와 스타일로 멋들어지게 소화해낸 영웅적 스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와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 ‘영원한 청춘’ 신성일과 함께.

전찬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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