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1년 세계는 변화 중] 불모지 일본에서도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

일본에서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된 프리랜서 기자 이토 시오리. 10월 방한 당시 국민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했다. 윤성호 기자
 
지난 9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열린 여성 차별 반대 시위 모습. 올들어 후쿠다 준이치 재무성 사무차관의 성희롱 사건과 일본 의과대학들의 여성 수험생 차별이 드러나면서 일본에서는 성범죄 및 성차별 반대 시위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아사카 유카 일본 중의원 공식홈페이지






글 싣는 순서
① 미국 : 사회연대로 진화하는 미투
② 일본 : 불모지에 부는 변화의 바람
③ 스웨덴 : 성 역할 탈피 성중립교육
④ 영국 : 임금격차 해소 ‘페이 미투’
⑤ 한국 : 활발한 여성주의운동과 과제


일본에서 미투(#MeToo) 운동은 확산될 것 같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의 벽이 높고 견고해서다. 지구촌이 미투 운동으로 뜨겁던 올봄, 해외 언론은 앞다퉈 일본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지금 일본에선 느리지만 변화의 조짐이 분명히 보인다.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점점 늘면서 단단했던 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일본판 미투 운동’의 상징은 프리랜서 기자 이토 시오리다. 이토가 지난해 5월 민영방송사 TBS의 워싱턴지국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을 때 일본 언론은 침묵했다. 5개월 뒤 성폭행 수사과정을 담은 책 ‘블랙박스’를 출간하고 해외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하면서 알려졌다. 이토의 용기에 자극받은 작가 이토 하루카, 모델 엔도 카오리 등 몇몇 여성이 미투 운동에 동참했지만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인신공격과 모욕뿐이었다. 이토 역시 2차 가해에 시달리다가 지난 7월 영국행을 택했다.

성폭력에 대한 일본의 침묵 문화는 뿌리가 깊다. 성폭행 신고율은 4%에 불과하다. 가해자보다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도쿄 카스미가세키의 변호사회관에서 만난 쓰노다 유키코 성범죄 전문 변호사는 “지난해 강간죄 관련 형법이 110년 만에 개정됐는데, 외국법과 비교할 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면서 “일본에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인권침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남성들이 많다. 사회의 인권의식이 낮은데다 성차별 문화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인식 때문에 일본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고 피해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만 만신창이가 되는 상황에서 미투 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토는 지난 3월 여성 언론인, 학자 등과 함께 일본인들의 무관심을 일깨우고 동참을 촉구하는 위투(#WeToo) 운동을 제창했지만 두드러진 성과는 없었다. 쓰노다 변호사는 “일본은 성폭력 피해자를 드러내지 않는 게 보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익명으로 싸우는 것은 일본 사회를 바꿀 수 없다”면서 “이제는 가해자가 비난받도록 사회 인식을 바꿔야 한다. 피해자가 숨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본에서 미투 운동이 다시 살아난 계기는 지난 4월 후쿠다 준이치 재무성 사무차관의 여기자 성희롱 파문이었다. 시사잡지 ‘주간신초’는 후쿠다 차관이 여기자들에게 “가슴 만져도 되냐” “호텔에 가자” 등 성희롱 발언을 일삼았다면서 녹음파일을 공개했다. TV아사히는 파일 속 피해 여성이 자사 기자라고 밝힌 뒤 재무성에 공식 항의했고, 후쿠다 차관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해당 여기자가 상사에게 후쿠다 차관의 성희롱을 보고하고 취재 및 보도를 논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후쿠다 차관의 사임은 보수적인 일본에서 미투 운동이 거둔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다. 무엇보다 최고 엘리트조직이라는 재무성의 차관이나 상사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잇단 여성 차별 발언은 일본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많은 여성들에게 성차별을 직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야당 의원들의 ‘미투’ 피켓 시위, 언론들의 잇단 보도로 이어졌다.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임을 결성해 도쿄 신주쿠에서 성차별 비판 시위를 연 것은 큰 주목을 모았다. 이들은 “그동안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참아 왔다. 이제는 참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들은 시위 이후에도 모임을 이어가며 페미니즘 잡지를 만드는 등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8월 도쿄의대에서 시작돼 현재도 진행형인 일본 의대들의 여성 수험생 차별 파문은 일본의 뿌리깊은 남성우위 문화를 보여주는 결정판이다. 도쿄의대 측은 “여성은 결혼과 출산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고 군색한 변명을 댔다. 너무나 노골적인 여성차별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놀랍기만 할 뿐이다.

문부과학성의 중간조사 결과를 보면 도쿄의대 외에 남성 수험생 합격률이 유난히 높은 준텐도대, 쇼와대, 니혼대, 도호쿠의과약과대, 규슈대 5개 의대가 여성 수험생을 차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쇼와대는 가장 먼저 차별 사실을 밝혔고, 준텐도대는 언론 보도로 확인됐다. 문부과학성이 곧 발표할 최종결과에서 얼마나 충격적인 차별 실태가 드러날지 알 수 없다.

의대들의 여성 수험생 차별은 수많은 여성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도쿄의대 앞을 시작으로 교토, 요코하마, 가나가와 등 여러 지역에서 성차별 반대 시위가 열렸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시위대 규모는 100명 안팎으로 크지 않지만 시위 문화가 사실상 사라진 일본에선 의미 있는 운동이다. 31일 만난 무타 가즈에 오사카대 교수는 “한 번에 수천명, 수만명이 참가하는 한국의 시위와 비교하면 규모가 크지 않다. 하지만 익명으로라도 일본 사회의 성차별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확실히 늘어나고 있다”면서 “작은 규모로 활동하는 일본의 여성 단체들이 연대한다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오사카=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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